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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y 18. 2020

사랑에 대해서 쓰려다 달력을 봤다

사랑 이야기는 하루 넣어두기로 했다.

밤을 새운 아침,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은 이런 날이면 우산을 꼭 챙기라고 연락해줘야 했던 그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챙겨 나가는 것을 잊고 비가 그치면 우산을 챙겨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비가 내린 날이면 약속처럼 술을 한 잔 마셨던 그날의 우리는, 술집 테이블 밑에 널브러진 우산을 주워 들며 그녀가 잃어버린 편의점 비닐우산의 수가 몇 개인지 세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선물해준 비싸고 커다란 장우산 마저 잃어버리고 돌아와 술에 취해 내 앞에서 울던 그녀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다. 쓴 글마다 날짜를

기록해두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은 5월 18일이었다. 5월은 어린이날에 어버이날, 스승의 날 같은 즐거운 날도 많지만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민주주의를 지켜낸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5월 18일 같은 날도 있는 달이다. 여러 기쁜 날 뒤에 다가온 슬픔은 더 큰 슬픔이었을 것이고, 칠천여 명의 어린이와 어버이와 스승과 제자가 다치고 죽어간 그 날,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살아가는 몇천만의 국민을 생각하면 감히 작은 슬픔이라 불릴 수 없다.


중학교 역사시간, 나는 518민주화항쟁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질문을 하기 위해 선생님의 말을 끊고 손 한 번 드는 것에도 용기를 내야 했다. 결국 하지 못한 질문을 목으로 삼키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찌 목숨을 내걸고 총과 탱크 앞에 서서 싸울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한 번은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 너희 아버지 시대가 그 시절 운동하시던 분들이 아니냐며 대단하다고 이야기했더니, 빼앗긴 나라도 되찾는 민족인데 민주주의 지키는 것쯤은 당연하단 식으로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용감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을 감히 가늠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 날의 역사를 담은 영화나 소설을 읽는 것으로 잠시나마 그들의 넋과 혼을 기려야 했다. 그리고 그중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5월이 되면 한 번씩 펼쳐보는 소설이 됐다.


<소년이 온다>를 알게 된 것은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이후, 한강이라는 사람이 내는 책들의 제목이 항상 서점의 베스트셀러 칸에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책을 처음 펼치게 된 것은 내가 몸 담고 있는 봉사단체 책누나프로젝트에서 2017년에 열린 책경매 행사에 <소년이 온다>를 기부해준 배우 류준열 형 때문이다.


그 해엔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했고, <소년이 온다>는 518민주화항쟁에 관련된 이야기를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보여주는 소설이다. 민주화항쟁에 앞장섰던 택시기사 200여 명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택시 운전사>에 출연한 형이 특별한 의미로 기부해 준 책이었다. 우리는 그 책을 경매에 올려 더 많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쓸 수 있었다.


<소년이 온다>는 내가 민주화항쟁에 관련해 책으로 읽은 첫 번째 소설이며, 영화로 보는 것보다 글로 적힌 아픔이 더욱 나를 깊게 찔렀다. 얽히고설킨 모두의 삶이 과거의 그들과 현재의 우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듯 나의 마음을 찔렀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고 난 이후로 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을 부러워하게 됐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분노와 용기를, 화합과 극복을 간접적으로나마 깊이 파고들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부러웠다.

내가 이 날을 기억하려는 것이 단순히 의식 있는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마음과 형태일지라도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하려는 이유에서 그렇다.


나는 그 날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과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을 잡아낼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40만 명이 사는 곳에 80만 발의 총알을 쏴 댄 사람들을 다 잡아내 감옥에 넣을 권한을 가지고 있진 않다. 정의롭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그 해 여름 뜨거운 햇빛 한 번 내어줄 만큼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이야기를 접고 고맙다고 몇 마디 적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이것이 생색일지라도 고맙다고, 정말로 고맙다고,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의 내가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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