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균 상태의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인간이 절대 선한 존재도 아니고,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어른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은 탄산음료를 마신다. 조절하는 능력과 합당한 책임을 요구하면 되는 거지, 몸에 나쁜 음식을 싹 다 없애면 무슨 재미로 살까?
욕도 비슷하다.
... 이제라도 욕을 하고 싶을 때는 잠깐만 멈춤! 하기를. 욕을 꿀꺽 삼기고 문장을 써보라. 나의 억울함, 분노를 욕이라는 헐값으로 날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럼 나중에 나처럼 작가가 될 수도 있다.
- p107 ~ 108 황영미 작가의 <사춘기라는 우주> 중에서.
주말에 동네 마을버스를 처음 타러 나갔다.
버스정보 안내 전광판에 '18분 후 도착'이라고 뜨길래 추적추적 비도 내리고 을씨년 인싸 흉내 내보자는 마음으로 버스 마중차 먼저 대여섯 정류장을 앞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무심코 잘못 들어선 골목 끝에서 마을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쾌재를 불렀으나 컴컴하고 비 내리는 밤, 기다리는 사람 한 명 없고 마을버스는 '차고지'에 있다는 전광판 안내를 본 순간.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는 공표에 실망하여 지하철로 돌아섰다.
그럴싸한 욕이 확 나오면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욕은 "에잇!"
느즈막 해서 돌아온 내게 남편은 "버스앱 하나 깔면 될 일을" 했다.
한번 탈까 말까 해서 후딱 다녀오려는 마음뿐이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말밤 엄마가 타는 지하철 막차는 얼마만인가.
거의 안 열리는 우측 문가 베스트 스폿 기둥에서 오랜만의 지하철 풍경을 관찰했다.
막차 풍경은 언제나 신비롭다. 허겁지겁이거나 모든 걸 내려놓았거나, 둘 중 하나의 표정들.
반대편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이후 일제히 승객들이 타는 대신.
무언가에 막혀 양쪽 늘어선 행렬 움직임이 없는 사이. 다리 불편한 학생이 휠체어 아닌 의자 형태의 지지대에 두 팔을 의지해 힘겹게 지하철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일행이려니 했던 진땀 나는 모습이 완연한 뒤의 학생은 문턱을 넘긴 후 사라졌다. 도움 준 행인이었다.
지지대가 자리 잡은 좌석 쪽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잠시 눈이 커졌다 일제히 감겼다. 격분되었다.
지지대는 뒤이어 탄 사람들에 의해 내 시야 밖으로 가려졌으나 입술만 달싹여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저 아이라인 강하게 칠한 문가쪽 의자 1번, 머리숱 많은 줄무늬 셔츠 2번, 손바닥만 한 핸드백 틀어쥔 3번,
기억하겠어.
다음 역에서 경유하느라 문이 열리는 건너편 기둥으로 건너갔다.
지지대 학생도 한 정류장 후의 경유지에서 내리려 문 앞에 바짝 위치해 있었다.
자리 양보를 못 받은 게 아니었다. 한 정류장 후에 하차하느라 문가에 있었던 것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욱했던 나 혼자의 억측에 스스로 민망했다.
어쩌다 보니 지지대에 몸을 의지하고 고개를 모로 튼 학생 바로 뒤에서 지하철이 멈추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옆기둥에는 휴대폰에 사활을 건 학생들이 일제히 눈을 내리깔고 초집중 중.
자동문이 열리고 지지대는 한두 발자국 앞으로 갔을 뿐 문턱 앞에서 주저하는 모양새였고 내 뒤로 내리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주저 없이 나는 학생의 반짝이는 블루톤 지지대 뒤쪽 바를 잡았다.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지지대를 밀어야 할지 영차 들어 올려서 내려야 할지 몰랐다. 의사를 묻기엔 실내가 시끄러웠다.
옆 사람들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같이 좀 돕자는 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뒤늦게 인지한 학생들은 휴대폰을 거의 버리다시피 달려들었다. 3,4초 사이, 힘을 쓸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나의 무력한 손은 허공으로 떨쳐지고 학생들이 합심해서 지지대는 문턱 밖으로 안전히 내려졌다.
지지대 학생의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틈도 없이 도움 준 학생들은 막차 지하철에 다시 올랐다.
이어서 바통터치를 받은 듯 또 다른 같이 내린 승객들이 앞다투어 지지대 학생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냐, 이쪽을 잡아주면 되겠냐, 층계가 많은데 승강기 방향을 알아봐 주겠다는 둥.
마치 잘 아는 친구를 돕듯 서로 일면식도 없는 주말 막차 지하철인들은 합심하여 지지대를 전진시켰다.
도움은 하나도 못 준 채 내일의 기둥들의 배려문화에 흐뭇한 표정의 나만 남았다.
출처 픽사베이
우리는 오해 속에서 이해를 강요한다. 또 많은 경우 오해한 주제에, 이해했다 자부한다.
가릴 건 싹 가리고 강요하고 싶은 부분만 잘라내어 내세운다. 매스컴이 그렇고 작게는 엄마 직업인들도 그런다. 본인에게 유리하거나 내세우고 싶은 부분만 오려내어 설득한다.
'세상이 얼마나 따뜻한가' 뭐 이런 식의 단언은 별로다.
세상은 언제나 차갑기도 뜨겁기도 뜨뜻하기도 썰렁하기도 해왔으니까.
내가 보고 싶은 기준으로 짜 맞추고 그 부분만 편집해서 '카더라'라고 화제로 올리진 않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경험이나 내 학식이나 내 연륜에 의하면 '그건 내가 잘 아는데'라고 일반화시키진 않았는지 귀갓길 곰곰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