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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일.

by 투스칸썬

학원 원장님이 아이 연산 푸는 속도를 올리라고 당부하셨다.

아이가 손바닥 반만 한 타이머를 사 왔다.

뒷면에 수은건전지를 꼭 눌러 넣고 오늘 날짜를 적어두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주 하는 말 중에 "언제부터 시작했지?"가 있다.

아이 앞머리 자른 게 언젠지, 정수기 필터 간 지가, 지하철 출구 공사 들어간 게 언젠지.

시시콜콜 시작시점이 난 참 궁금하다.




물건을 집에 들여놓을 때.

분리배출할 플라스틱통이면 통 표면에, 두고두고 쓰거나 물기 묻을 물건은 네임 스티커에 각자의 생일을 써둔다.

오늘은 손세정제와 선스틱, 수분크림.

환영해, 반갑다!



우리 집에 업혀온 날짜보다 실사용 시점이 녀석들

생일.

그러다 할 일을 마치거나 소진되거나 사용 마감 시 작별할 때면 각자의 생일날을 확인한다.

"에구, 석 달 동안 잘 썼다. 안녕." 혹은 "너랑 벌크로 묶인 세트 내놔야겠네. 그간 수고했다." 치하한다.

나만의 애도문화와 작별의식이랄까.




이렇게 안 해도 모든 공산품이나 제품에는 생산일자나 유효기간이 표기되어 있다.



그저 녀석 누구든 우리 집이나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우리 인연의 시작을 꼬리표처럼 표시하는 게 내겐 당연하다.


사무용 펜이나 당근, 우유 같은 아이들에게야 그러지 않지만 좀처럼 썩거나 고장 나서 작별하기 흔치 않은 세상, 이거 저거 잘 사지 않는 내 수중에 들어오면 고락을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간다.


친구 ㅅ이 우리 집에 와서는 "어머, 너희 집은 네임택 안 붙은 아이가 없구나. 난 냉장고 문에 작년 마트 영수증 붙여놔서 남편이 한 소리하더라. 알뜰주부 코스프레라고. 왜 이러는 건데?"


아뭇소리 없이 우리 집 이곳저곳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녀석들 생일을 한 번씩 확인하면, 그냥 좋다.

전자제품같이 오랜 세월 한집에 산 녀석들은 "요 녀석 들여놓은 지 이리 오래됐다고?" 하고 한번 더 보게 된다.

옷 좋아하는 사람이 옷방에서 함박미소 짓는 그런 느낌?

애정 표현방식이라고 해두자.




강낭콩 관찰일지 두 달째인 아이.

방울토마토 열매 맺기를 석 달째 기다리는 엄마.

몇 번씩이나 아이들 생일을 확인한다.

20센티. 이파리 네 장으로 시작해 줄기가 50센트에 8장의 이파리.

그리고 강낭콩은 드디어 꽃이 피었다. 아이의 승리!

가만 보면 어제와 오늘같이 똑같은 게 없지만 이렇듯 수치와 메모를 보면 가만있는 건 무엇하나 없다.

물건은 낡고 닳고 길이 들고 스러지고 생명은 무르익고 성장하고 꽃을 피운다..


소비 습관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도, 그런 것 없다.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다 한 번씩 궁금하고.

끝나가는 시기가 되면 음. 요 녀석 얼마쯤 걸렸네.

굳이 하나하나 쫓아다니며 생일스티커를 붙여놓는 일이 쓸데없기도, 무용하기도 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by 나태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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