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스칸썬 Oct 18. 2023

믿은 내가 바보래요.

남편은 운전을 좋아했다.

퇴직 후 경제적으로 힘든 적적하신 어르신들을 태울 관광버스를 장만해서 여기저기 모셔드리고.

어르신들이 관광하시는 동안 호젓한 곳에서 본인은 플라잉 낚시를 하는 것이 꿈이란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노후 계획이자 재능기부를 꿈꾸는 삶이라니!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녀석들의 보금자리 어항을 들여놨다.

여차하면 정약전 님의 자산어보라도 독파할 듯한 기세로 낚시와 물고기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이 모두는 그의 꿈을 향한 과정이려니 흐뭇하게 바라보는 꼬꼬마 새색시 시절이었다.


워크숍을 가면서 배가 산만해진 날 붙들고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라는 드라마 대사 대신. 

주말이면 꼭 어항청소를 해야 하니 바닥에 깔린 자갈과 돌들 박박 닦고 수돗물은 미리 받아둔 걸 구분해 쓸 것이며 체망에 조심해서 어류들을 다뤄달란 당부만 늘어놓았다.

몹쓸 취미 같으니.

물고기 수질관리사로 2박 3일을 보내며 꿈도 몹시 불안해졌다.




결혼 전 두 손을 맞잡은 연인에게 내가 밝힌 꿈은 언젠가 회사생활 접는 대로 반년 간 이태리로 나 홀로 떠나기.

이탈리아라고 하지 않고 더 멋들어진 느낌이라 한사코 이태리라 했고 달나라 가겠대도 단번에 오케이 할 연인은 그게 대수냐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들은 야무진 꿈을 나눠갖고 결혼했다.




스트레스받을 때 비린내 물씬 나는 생선을 먹어야 기운이 솟는 사람이 있다. 나다.

반면 파닥파닥 튀도록 오겹살과 소시지를 바삭하게 굽고 절인 마늘과 고추, 양파에 진한 쌈장을 쌈에 수북하게 쌓아 앙 하고 입에 넣으면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남편이다.



한편, 고기 굽는 냄새에 방문을 닫아걸고 향초부터 허겁지겁 피우며 질색하는 사람인 나와 고춧가루 가득 친 바글바글 생선 조려지는 냄새에 덜 찬 종량제봉투라도 들고 내빼는 사람이 있다. 남편이다.


바닷가 출신 남편은 생선 살점에 젓가락이 닿기만 해도 화들짝 인상부터 쓴다.

뒤돌면 튼실한 흑돼지 오겹살을 보내오는 친정을 두었으나 그림의 떡일 뿐 고기 냄새보다 더 고역은 없는 게 나다.

우린 이렇게 안 맞다.


생선은 남편 야근날, 고기는 내가 일찍 잠드는 날 엇박자로 식탁에 차려진다.



남편은 천사 같은 인생 2막을 살겠노라 연인에게 호언장담하던 꿈 자체를 잊었다.

당연히 나의 이태리 반년살이 꿈을 김태리보다 더 생뚱하게 잊고 산다.

"당장 아이들 키우고 먹여 살리기도 바쁜 판에 꿈은 무슨."

 

고기와 생선이 혼연일체 되지 않는 저녁메뉴보다 어쩐지 난 한 번씩.

나만 이룰 것 같은 꿈이 그에게도 다시 찾아들길.

큰마음먹고 지난달부터 넣어주는 자기 개발비의 내 진의를 스르륵 기억해 내길.

난 오래도록 기다려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맨들맨들살 준비됐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