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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방으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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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칸썬
Mar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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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오기 전, 남편은
한 가지만
요구했다.
1인용 소파.
집은 넓혀왔고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데다 거실은 반듯한 편인데.
서재로 방을 구분해 쓰지 않는 이상.
마땅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종일 1인소파 링크를 보내왔다.
구조를 싹 고치진 않아서
우리 집은
거실과 베란다 사이에 낡은 중문이 있다.
아예 철거를 할까 한참 고심했으나 외풍을 막거나 파티션 역할이 되겠어서 놔뒀다.
또한 기둥 역할로 처음 설계됐으니 철거는 조심하는 게 좋다는 업자 조언도 맘에 걸렸다.
이삿날, 예상치 못하게 베란다 끝에 위치한 세탁실 안으로 건조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일자로 세탁실을 마주하는 베란다 측면으로
건조기를 놓았다.
건조기 배수를 호수로 빼내어 물통 갈아 끼우는 귀찮음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가 적잖은 실망.
하지만,
새하얀 벽면에
실오라니
하나 없이 벽걸이 모니터만 놓고 맞은편 1인소파에 파묻힐 파라다이스를 꿈꾼 남편 실망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선책으로 건조기 위에 요즘 잘 나오는 철제 선반 두 칸을 짜서 올리니 첫 칸은 모니터, 위칸은 소품과 액자를 놓을 공간이 생겼다.
아기자기한 꾸미기는 우리 인테리어 방향과는 다르나 아무렴 어떤가.
취향도 만들어가는 거지.
철제선반 맨 위칸. 놀릴 수는 없어 잡히는 대로 놓았다.
엄마의 주장대로 이 알짜배기 공간을 '비디오방'으로 이름 붙였다.
남편은 환하고 이쁘게 생긴 전등을 갈아 끼우는 것으로 비디오방 정 붙이기를 시작했다.
무념무상으로 앉아 멍 때리기 딱인 문화공간.
"내가 뭘 하려 했더라?" 건망증에 잠시 앉는다는 것이 탁자에 두 다리 척 걸쳐놓는 건방진 자세가 나오는 곳.
노트북으로 일을
보
고 휴대폰 검색도 거침없는 곳.
체중계와 아령, 스트레칭 밴드를 두어, 잊었던 기지개를 켜게 되는 곳.
거추장스러운
베란다
중
문을
닫으면 거실과 차단되는데.
베란다에 처박힌 혹은 밀려난 느낌보다 나만의 세계, 자처한 고립무원이 따로 없다.
한적한 오후.
비디오방에서 창가에 내려뜨린 우드톤 블라인드를 끝까지 올리고 내다보면 아이들이 쫄랑쫄랑 집으로 오는 장면이 그림 같다.
눈앞에선 야단치고 화만
내
지만 한 발만 멀어지면.
저런 과분한 보석들을 맡기신 신에 대한 감사로
벅차오른다.
잠시 후 도어록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입장하며 한마디.
"엄마, 또 비디오방에 있었죠?"
보들보들한 담요와 푸근한 쿠션을 마구마구 늘어놓고 스낵바처럼 간식거리가 놓여있다.
급히 봐온 장바구니나 정리 전인 택배박스를 들여놔도 눈에 안 띄고
.
혼미한 머릿속 달래느라 숨어있기도 좋은 방.
코로나로 놀란 가슴. 혹시나 하는 감기에도 격리가 제격일 때 독차지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매주 목요일 오후마다 학원 스케줄 대신 영화감상 데이를 만들었다.
두 녀석이 엉덩이를 붙이고 막대사탕을 빨 수 있는 꿀 같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다.
단점도 시시콜콜 털자면
여럿이
다.
그래봐야 베란다니 많이 춥고 많이 덥고
뒤돌면
먼지가
한주먹씩 나온다.
세탁실에서 세탁물을 건조대까지 옮기는 과정에서 소파에 수건이나 점퍼의 소매 부분이 걸리기 십상.
세탁기나 건조기가 돌아가거나 창문을 열어야 하는 겨울 외의 삼계절 소음도 질색이다.
그럼에도 비디오방에서 건방진 자세로 쎈텐하듯 늘어지다 보면.
한겨울 추운 손을 파리처럼 비비며 비디오테이프 빌려오던 언니 생각이 난다.
가장 유치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어린애 같지만 정작 용감하고 과감하고 생색낼 줄 모르는 언니.
베니와 신나게 뛰다 돌아온 언니와 영상통화 하는 곳도 비디오방이다.
출처 픽사베이
아무도 없는 사이.
브런치와 함께하는 이 시간.
그리고
핫한 <더 글로리>
시즌2
드라마
를
속히 볼 장소도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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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칸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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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학을 열망하는 에세이를 씁니다. 신간과 신제품 시음을 지나치지 못하면서 올드 정서가 좋은 마릴라 엄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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