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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박찬선 Jun 01. 2017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마음의 등불을  켜라 - 사랑으로

사랑은


사랑은 어둡고 침울한 곳에 밝은 빛을 비춰줍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자라고 행복이 자라고 꽃이 피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중에 소홀히 대접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죽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 이 마을엔 ‘딩카족’이 삽니다. 딩카족은 용맹하여 절대 울지 않는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존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던 ‘딩카족’은 살아있는 치아를 생으로 뽑고 불에 달군 칼로 얼굴에 몇 개의 V자를 그어도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최고의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신부의 죽음 앞에서 모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2010년 1월 4일 폭설이 내리던 날 “사랑 그리고 희망”이란 기획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한 기자가 이태석 신부를 인터뷰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던 신부님은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습니다.      

“돌아... 가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태석 신부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늘나라? 집으로? 아닙니다. 아프리카 수단에 있는 톤즈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와이의 외딴섬에서 평생을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 세상을 떠난 다미안 신부의 일생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면서도 본인이 한센병이 아니어서 그들을 십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던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에야 드디어 환자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한센인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스스로를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미안 신부와 같은 삶을 살고자 했던 그 소년 이태석은 자신도 신부가 되어 평생을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다미안 신부와 같은 49의 나이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2008년 11월까지 8년 넘게 섭씨 45도가 넘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사랑과 섬김의 사역을 해왔습니다.

1999년 전쟁 중이던 톤즈를 처음 방문한 이태석 신부는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 전쟁 통에 다친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아낙네들, 하루 종일 전쟁놀이를 하며 빈둥거리는 아이들. 그는 그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서원하고 그곳에 머물며 자신의 생을 헌신한 것입니다.     

예수님마저 버린 것 같은 절망의 땅, 톤즈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곳에 남아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통에 부서진 건물을 보수해서 학교를 짓고 선생들을 데려와 수업을 하게 하고 본인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에서 기금을 모아 학용품을 조달하고 교복을 모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교복이란 걸 입히고 학생증도 만들어주었습니다. 집이 멀어 오가기가 힘든 아이들을 위해 기숙사를 마련하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전등을 달아줍니다. 그렇게 척박했던 톤즈라는 땅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학교가 세워진 것입니다.

의대를 나온 이태석 신부가 해야 할 일은 또 있었습니다. 병원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작은 질병으로도 죽어가는 환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말라리아로 죽고, 결핵으로 죽고, 작은 상처들이 치료받지 못해 세균 감염으로 죽었습니다. 약간의 약을 써도 살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습니다.

병원을 세우고 나니 백신들이 필요했습니다. 어렵게 백신을 구했더니 이제는 보관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불모의 땅 아프리카에서 냉장상태로 보관해야 하는 백신들을 위해 냉장고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태양열 시스템을 만들어 냉장고를 가동했습니다. 뭐 하나 갖추어진 게 없었지만 하나씩 하나씩 직접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낮은 땅에서도 더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마을엔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마을에 이태석 신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자 환자들은 노래와 춤으로 신부님을 환영하고 기뻐했습니다. 여기저기가 썩고 곪아 피가 흐르는 환자들, 얼굴은 일그러지고 손과 발,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작은 상처가 나도 그 상처가 곪아 썩어 들어갑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이들을 도울 까?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해답은 신발이었습니다. 발 모양도 다 제각 기인 그들의 발을 하나하나 종이에 그렸습니다. 그리고 일일이 다 주문제작을 했습니다. 썩고 문드러진 그들이 발은 무엇 하나도 같은 모양일 순 없었기에…

착화식 날 생전 처음으로 신어보는 신발을 신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손뼉 치며 노래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환한 얼굴들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톤즈 마을은 신부님의 사랑으로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변화와 새 희망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 톤즈 마을에서 이태석 신부는 “졸리” 신부로 불렸습니다. 세례명이 ‘존’이었는데 이것을 톤즈 마을에서는 “쫄”이라고 발음하며 신부님의 성을 붙여 “졸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 그가 2009년 초 뜻 밖에 대장암 선고를 받고 국내에 머무르면서 항암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체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갔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머문 곳에는 생명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사랑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따뜻한 마음에서 부드러운 언어가 나오고 밝은 미소가 나옵니다.      

사랑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항상 변화는 사랑할 때 생겨납니다. 사람을 얻는 것도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미녀와 야수라는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야수가 된 왕자는 폐허로 변한 왕궁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0살이 될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면 왕자는 평생 야수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왕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왕궁에 사로잡혀 있는 아름다운 미녀 벨의 마음속에 왕자를 향한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야수로 변화 왕자는 벨과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아름다운 벨에게 모든 친절을 다 베풀어줍니다. 벨이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보고 싶다고 말하자 야수는 마술 거울을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술 거울을 통해 슬픔에 젖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벨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야수는 고민합니다. 만약에 벨을 보내버리면 자신은 일평생 야수로 살아야 할 것이고 벨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벨이 고통 속에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결국 야수는 심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벨을 아버지에게 보내줍니다.      

바로 그 시간, 이전에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저주를 받아 시계가 되고 주전자가 되고 촛대로 변해 버린 신하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저주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수가 된 왕자와 미녀가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다면 왕궁에 내려졌던 저주들이 풀려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왕자가 그 신하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왕자에게 묻습니다.

“왕자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벨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신하들을 경악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벨은 마법의 거울에 비친 죽어가는 야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즉시 야수의 성으로 달려옵니다. 그러나 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결국 벨은 죽어버린 야수를 끌어안고 그에게 뒤늦은 사랑 고백을 했습니다. 그 순간 추악한 모습의 야수는 잘 생긴 왕자로 변하여 다시 살아납니다.     

저주받아 어둡고 침울한 왕궁과 왕자를 변화시킨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야수가 된 왕자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오자 그는 더 이상 야수가 아니었습니다. 겉모습은 야수 일지 모르나 이미 마음은 왕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상랑 받은 때 스스로 존귀한 존재임을 느낍니다. 존귀함을 느낄 때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수준이 높아집니다. 품위가 생겨납니다.


헨리 드러몬드의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왜 당신은 내일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이유는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당신도 내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내일 사랑을 베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상대가 없을 때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친구가 있고,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개를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만 있어도 그는 생명을 부지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 한가? 의 여부는 사랑으로 결정됩니다. 행복은 소유나 재능, 지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열정이 넘치고 의욕이 충만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열정을 공급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도 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외모를 가꾸거나 재능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잃을까 늘 두려워합니다. 사랑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습니다. 당신 주변에 친척이나 친구 100명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들 모두가 당신을 만날 때마다 기뻐해 주고 반가워해 줍니다. 당신을 칭찬해주는 소문들이 간간히 당신의 귀에 들립니다. 그런데 100명 중에 딱 한 사람만이 당신을 싫어합니다. 웬일인지 당신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다니고 없는 소문을 만들어 퍼트리고 다닌다면 당신은 행복하겠습니까? 물론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한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점수로 환산해 보면 99점이나 되지만 그 점수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을 갈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증오 슬픔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아무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은 내가 사랑하기 원하거나 내가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그 사랑을 거부할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미움이고 증오입니다.      

그러면 관심은 무엇일까요?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내가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의 관심은 그 사람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나의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돌봄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은 마음에서만 머물지 않고 손과 발을 거쳐 상대방을 위한 구체적인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화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 화초를 죽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많은 것을 주었음에도 더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주 조금만 주고도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다 주었는데도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은 이해입니다.

사랑에 관심과 돌봄은 있을 지라도 이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맹목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모인 경우 모두 자녀들에게 최선의 사랑을 쏟아붓지만 놀랍게도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정말 사랑하는지 날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상대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생활 가운데 파탄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상대방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서 둔감하며 무지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랑에는 지식이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사랑에 관심과 돌봄은 있지만 존중이 빠지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며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향해 “이런 습관만 고치면 좋을 텐데”라고 하면서 상대를 조종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존귀하게 대합니다.      

사랑하지 않고 소유하는 것에 대해 얼마든지 관심과 돌봄을 표현할 수 있다. 자동차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세차를 자주 하고 엔진오일 상태를 자주 점검하고 그것들을 적절한 때에 갈아 줍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존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조종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존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존중이란 무엇일까?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거나 높여주는 삶의 자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개성을 인정해 주고 나와 다른 점을 용납하게 됩니다. 존중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용납하는 것이며, 상대방을 얽매거나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를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면 방탕하게 살고 많은 고생을 할 것을 알았지만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노예의 마음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매일 대문 밖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에는 존중이 함께 가야 합니다.      

아내를 무시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자녀들에게 핀잔을 주고 야단을 치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 역시 위선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가족들 간에도 사랑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소유하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 가운에 갈등이 생기고 끝내 파탄에 이르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기술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술은 배우고 훈련해야 능숙해집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기술인데 기술은 배우고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도 기술이라면 반복해서 배우고 훈련해야 능숙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랑할 때 밝은 불이 켜져 환해집니다. 밝은 마음에 웃음이 넘치고 행복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따뜻한 곳에서는 생명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면 따뜻해집니다.      

따뜻한 마음에서 부드러운 언어가 나오고 밝은 미소가 나옵니다. 따뜻한 언어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하며 춤추게 만듭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춤추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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