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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Mar 30. 2024

목록의 의미: 이방인의 편견 없는 시선이 만든 목록

[북리뷰] 울프 마이어. 서울 속 건축. 안그라픽스. 2015.

1. 목록이 갖는 의미


선정은 권력이지만, 모든 권력이 권위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여럿 가운데서 어떤 것을 뽑아 정함'을 일컬어 선정(選定)이라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제로는 작품 선정, 사업자 선정, 필자 선정 등을 들고 있죠. 

여럿 가운데서 어떤 것을 뽑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행위 역시 몹시 자의적인 기준에서 실행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선정 결과에 권위가 부여되지 않을 뿐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베스트 10' 같은 선정행위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여기에 '공신력'이라는 권위가 부여되어 있길 기대하곤 합니다. 유튜브나 블로그 콘텐츠를 살펴보면 '개나 소나' 자의적인 선정 권력을 행사합니다만, 그 '공신력'을 문제 삼아 선정행위의 무용성이 반증되곤 합니다. 좀 웃기는 일이지요.


문학권력이란 용어의 탄생 배경에는 이 '선정'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권력이 권위마저 얻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등단'이란 제도를 통해 사람을 가려서 문단에 편입시키는 권력, '문학상'이란 제도를 통해 문단 내에서도 상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권력이 출판사 개개의 주관적 발현에서 시작했던 거죠. 하지만 그 과정에 문단 내 권위자들의 권위를 덧칠해서, 그럴듯한 권위의 자가증식을 꾀합니다. 그렇게 '선정'의 과정에 개입하는 권위자들은 권력을 분점 하며 거대한 '문학권력'을 이뤄냈던 것이죠. 그렇다 보니 선정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권위를 공고히 한다는 그 순환구조에 편입하기 위한 노력들은 여러 곳에서 일어납니다. '슬프지만 진실'인 이런 관습을 무심히 보고 넘기긴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하여 선정의 과정이 끝나면 하나의 '목록List'이 나오게 됩니다.

노벨문학상이 예비 후보preliminary candidates와 최종 후보final candidates로 목록을 만든다던가, 부커상 booker prize international이 Long list와 short list를 내놓는다던가, 그래미상이 Grammy Awards가 후보와 수상 앨범과 아티스트의 목록을 내놓는다던가, 아카데미상 Academy Awards가 수상 영화와 배우의 목록을 내놓는다던가 합니다.

이런 목록들은 종종 우리의 선택에 도움을 주곤 합니다. 길고 복잡한 평가의 과정을 남에게 맡기고, 그 평가 결과만 속 편하게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소비자행동론은 AIDMA로 설명했었지만,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AISAS로 변했다고 봅니다. 소비자가 직접 검색하고 구매하며 이를 공유한다는 거죠.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됐습니다. 시나 아이엔가Sheena Iyengar의 실증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선택의 역설이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충~ 권위에 의존하는 소비가 마음 편합니다. 트렌드코리아2024에서는 '디토소비'라는 용어를 통해 이와 같은 소비자행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잉의 시대다. 상품·정보 제공·구매 채널이 모두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수많은 선택지에 직면하게 된 소비자들은 새로운 소비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정보 탐색, 대안 평가 등 제대로 된 구매 의사결정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그냥 "나도ditto" 하고 특정 사람·콘텐츠·커머스를 추종해 구매하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 대리 proxy가 제안하는 선택을 추종하는 소비를 '디토소비'라고 명명한다.
-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4. 미래의창. 2023.

그렇다 보니 우리는 '재즈 명반 100선', '대한민국 명반 100선',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선', '한국근현대미술 명화 100선'과 같은 리스트를 목차contents로 삼은 책들을 심심찮게 접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책들을 종종 찾아 살펴보곤 합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과 인천, 경기의 200여 개 건축물을 선정해서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울프 마이어의 목록이 갖는 의미

서울의 건축물에 대한 책들은 꽤 많습니다. 작년 한 해에만 같은 주제로 출간된 책이 여러 권이며, 국내 유명 건축가들이라면 으레 한 권씩은 서울의 건축물이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건축물을 리뷰한 책을 내놓았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서울 건축'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무려 130권의 책이 결과로 나옵니다. 같은 주제의 책은 '썩어나게'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록'이 갖는 의미를 굳이 찾아내야만 책장을 펼쳐들 이유가 생길 겁니다.  

이제 한국어로 펴낸 이 책을 통해 한국 독자에게 서울의 가장 흥미로운 건축물을 소개하게 되었다. 이방인의 편견 없는 시선이 독자에게 신선하게 다가가길 바라본다. 
- 머리말 중에서

"이방인의 편견 없는 시선"이라는 점만이 이 책의 목록이 지니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이나 사진은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해당 건물에 대해 인터넷 검색만 해도, 훨씬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글은 물론이요, 높은 해상도에 다양한 사진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저 작은 책 안에 200개의 건축물을 구겨 넣었고, 무엇보다 '가이드북'으로 기획되었으니 그 한계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서울사람이, 더 나아가 대한민국사람이 개별 건축물에서 찾아내는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건축학적 맥락에서 더 나아가서는 인문학적 맥락에서 건축물 바라볼 때에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누가 어떤 시점에서 무슨 맥락으로 서울의 건축물들을 바라보았느냐가 그 목록의 관건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점에서 이 책은 '외국인'이 '건축학적 맥락'에서 바라본 서울의 건축을 목록에 담은 겁니다. 딱 그 정도가 이 책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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