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로 보기 위한 첫걸음으로 제격
국제부 기자임에도 “지구상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할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오해했다는 것, 내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었다. 더욱이 로슬링은 ‘극적인 이야기’(전쟁·난민·질병·테러 등)로 구성된―나도 많이 써온―기사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주요 원인은 뇌의 본능이다.) 나의 ‘극적인 세계관’이 ‘극적인 기사’를 쓰게 하고, 한국의 ‘오답률 96%’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면, 어딘가 개운치 않지만 자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 전정윤, <팩트풀니스와 트루풀니스>, 한겨레, 2020. 5. 13.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한겨레의 ‘편집국에서’라는 이 칼럼이었습니다. 전정윤 기자의 절절한 자기반성 때문에 이 칼럼을 기억하게 됐는데요,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뒤엣것, 그러니까 ‘트루풀니스’라고 꼬집는 부분이 더 눈에 띄더군요. 아무래도 2000년 5월에 뒤통수 얼얼하게 만들었던 ‘팩트풀니스’라는 지적이, 지금에 와서는 ‘포스트트루스’를 고민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러 염려로 바뀐 탓일 겁니다.
칼럼에서도 절절하게 드러낸 진정윤 기자의 당혹스러움을 저 역시 머리말을 읽으며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가지고 있던 직관적 이론intuitive theories 때문이겠지요.
앤드루 슈툴 먼 Andrew Shutulman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따로 배우지 않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터득한 설명”을 직관적 이론이라고 정의합니다. “스스로 관찰했던 모든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짐작한 이유,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추측”이라고 부연하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이 직관들이 종종 틀린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무식하고 못 배워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의 신념 체계로까지 승화한 ‘방법론적 회의’의 결과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한스 로슬링 역시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27쪽
사람들이 내 질문에 무척 극적이고 부정적인 답을 하는 이유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 탓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끊임없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참고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잘못되면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을 내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 세계관이 불필요한 건 아닙니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매번 솎아내고 모든 결정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면 평범한 삶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스 로슬링은 말합니다.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의 책, 『당신이 속는 이유』에서도 같은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를 불신하면서는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며, 모든 세부사항을 직접 조사할 수도 없”으니, “문제는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확인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큰 때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자신의 판단을 유예해야 한다”라고 말이죠.
따라서 머리말을 통해 ‘사실충실성’에 대해 건네는 조언은 주목해 볼 만합니다. “내가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결코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학문 연구의 첫 번째 방법론으로 삼은 르네 데카르트의 400년 전 충고처럼 말입니다.
31쪽
‘사실충실성’은 건강한 식이요법이나 규칙적 운동처럼 일상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일단 연습해 보라. 그러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암기하지 않고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진짜 위험성과 여러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되 엉터리 정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Factfulness, like a healthy diet and regular exercise, can and should become part of your daily life. Start to practice it, and you will be ablet to replace your overdarmatic worldview with a worldview based on fact. You will be able to get the world right without learning it by heart. You will make better decisioins, stay alert to real dangers and possibilities, and avoid being constantly stessed about the wrong things.
대학 시절 불교철학 교양 강좌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컵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끈질기게 ‘관념’에 기대어 경계를 주장했고, 교수님은 실재를 통해 관념의 부실함을 논파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단위까지 반박당하자 ‘안과 밖’을 구별하는 실존하지 않는 ‘경계’에 대한 관념을 주장하던 제 억지를 포기하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경험해 왔습니다. 당장 철학적 인식론epistemology만 봐도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분법이 자리 잡았고, 존재론ontology에서조차도 유심론과 유물론의 이분법적 대립은 공고한 편입니다. 복잡한 세계를 보다 단순하게 이해하려면, 데카르트의 세 번째 충고도 받아들여야 할 듯합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쉽게 인식되는 대상들에서 시작해 조금씩, 단계적으로, 가장 복합된 대상들의 인식에까지 올라가기 위해 내 사유들을 순서에 따라 인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 체계를 갖춘 것이겠지요. 물론 거기서 생각이 멈춰서는 안 되겠지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을 종착점으로 여기고 생각하기를 끝내버린다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서 그러고들 넘어가니 어쩔 수 없긴 합니다.
38쪽
우리에겐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 나아가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하는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있다. 이 간극 본능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그림을 부자와 빈자라는 두 종류의 국가 또는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I’m talking about that irresistible temptation we have to divide all kinds of things into two distinct and often conflicting groups, with an imagined gap-a huge chasm of injustice-in between. It is about how the gap instinct creates a picture in people’s heads of a wolrd split into two kinds of countries or two kinds of people: rich versus poor.
간극본능이라는 표현을 납득하긴 어렵지만,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이분법 안에는 부자와 빈자로 나누는 것도 존재하긴 합니다. 한스 로슬링이 제공하는 세계 건강 도표world health chart만 봐도, 미국은 중국보다 부자 나라이고, 중국은 인도보다 부자 나라이며, 인도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비해 부자 나라입니다. 컵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의 개념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우리의 직관이 대놓고 안쪽인 곳을 안쪽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도표 안의 대별적 국가들의 차이가 눈에 들어노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거대 오해mega misconception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방법적 회의’가 끝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겠지요. 이분법적 개념이 사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착점이 되는 게 문제인 것이지, 이분법적 개념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5쪽
사정이 이러니 오늘날에도 아동 예방접종, 원자력, DDT 같은 주제를 사실에 근거해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의 책, 『페이크와 팩트』나 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핵발전에 대한 나이브함 때문입니다. 백신 배척과 탈핵을 동일선상에 놓는 단순화에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백신 배척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통계가 백신의 유용성을 입증하고 있지만, 핵발전의 위험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통계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엄밀한 통계만 가져다가 주장에 뒷받침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자승자박 하는 꼴입니다.
로슬링과 그라임스는 원자력이 기후 위기 해결에 필수적이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 측은 원자력의 잠재적 위험성과 장기적인 부담, 대안 에너지의 가능성을 근거로 그 확대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도 각각의 가정과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기에, 논의는 단순히 '위험/안전'을 넘어서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와 방향성에 대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단순한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이며 의사결정의 방점을 어디에 둘 것이냐는 정치적 문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181쪽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마찬가지의 시각입니다. 단순한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에 기반한 정책 결정과 그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검토 그리하여 얻어지는 피드백까지 포괄하는 몹시 복잡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가 됩니다. 뭐랄까요, 김동인의 소설 「K박사의 연구」에서 보이는 K박사의 나이브함을 느끼게 됩니다.
97쪽
인류의 다양한 발전과 더불어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도 놀랍도록 개선됐다. 이처럼 좋아진 언론 보도 자체가 인류 발전의 표시이지만, 그 덕에 사람들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꽤나 거슬리는 것이 언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비판’입니다. 언론보도는 대체로 당대의 사건에 대한 공시적 분석에 그치는 스트레이트 기사로 다루기 마련입니다. 통시적 맥락을 드러내야 하는 건 웬만한 피처기사가 아니면 힘들고요. 따라서 언론인에 대해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면 그 사건의 비중을 과장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부정적 뉴스의 왜곡된 영향력을 알고 있는 일부 언론인은 나쁜 뉴스를 찾는 습관을 버리고 의미 있는 저널리즘을 추구하겠다는 목표 아래 좀 더 건설적인 뉴스를 지향하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라는 몹시 정치적인 발언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어 ‘언론’이라고 한 데 뭉뚱그릴 수 있는 대상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 ‘그들’로 상정하는 이분법적 사고일 뿐입니다.
295쪽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The blame instinct makes us exaggerate the importance of individuals or of particular groups. This instinct to find a gulity party derails our ability to develop a true, fact-based understanding of the world: it steals our focus as we obsess about someone to blame, then blocks our learning because once we have decided who to punch in the face we stop looking for explanations elsewhere.
인간에게는 귀인attribution 욕구가 존재하고, 이 과정에서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를 겪곤 합니다.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외부 요인이나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개인의 특징(의도와 성격)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나타나는” 근본fundamental 귀인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집단에는 책임자가 있습니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반드시 책임자는 존재하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한스 로슬링의 개소리 bullshit를 좀 차용한다면, 할머니에게 받은 용돈을 노바르티스에 기부하지 않은 내 얼굴에 주먹을 한 대 꽂는다면, 은퇴기금을 받는 할머니는 두 대를, 은퇴기금의 운영자들에게는 열 대를, 노바르티스 이사회의 이사들에게는 100대를, 노바르티스 대표는 1000대쯤을 때리면 됩니다. 오히려 비난 가능성을 정교하게 탐색함으로써 진실을 찾아내고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해결하기에 너무 복잡하고 수단이 부족하다고 해서, 정당한 비난 가능성을 융해한다면, 한스 로슬링은 또다시 자승자박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질문한 모든 집단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더 폭력적이며, 더 가망 없는 곳으로 한마디로 더 극적인 곳으로 여겼다”는 로슬링의 한탄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그러나 “코로나19 이전 모든 집단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안전하고, 더 평화롭고, 더 희망 있는 곳으로 한마디로 더 극적인 곳으로 여겼다”는 코로나19의 교훈 역시 절반의 팩트풀니스다.
- 전정윤, <팩트풀니스와 트루풀니스>, 한겨레, 2020. 5. 13.
칼럼을 읽고 이 책을 찾아본 지도 5년이 지났고, 그 와중에 몇몇 책들을 읽으면서 ‘머리가 굵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과 같은 격렬한 공감은 줄고, 마뜩잖은 부분들이 더 드러나더군요. 마치 전정윤 기자의 칼럼처럼 말입니다.
의외로 이 책은 꽤나 많은 공격을 받고 있더군요. 챗GPT는 “세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한 낙관주의, 통계 중심의 단순화된 세계관, 정치·문화적 맥락의 부족, 행동의 지향성 부족 등의 한계를 보인다”는 비판을 수집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세계 이해의 보조적 도구로 유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현실의 총체적 이해를 제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판적 독해가 요구되는 책”이라고도 정리합니다. 제미나이 역시 비슷한 비판을 수집했습니다. “데이터 선택 및 해석의 편향성, 지나친 낙관주의, 단순화의 위험성, 정치적 맥락의 부재” 등을 지적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리뷰와도 결을 같이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게으름 정도는 깨우쳐줄 테니까요. “세계 이해의 보조적 도구”라는 챗GPT의 수집정보에는 격하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단순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미덕을 갖춥니다.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 그러니까 세계관을 재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 너무 빡세면 쉽게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해하기 좋은 책으로 도전하는 게 맞겠지요.
그렇게 이 책을 다 읽고 난다면 다음 세 권의 책들도 권해봅니다. 만만찮은 책들이지만, 정말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