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적으로 고찰한 도서관 책 밑줄 빌런의 심리와 내가 분노하는 이유
그럴 때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김수영의 싯구를 떠올리게 되서 꽤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분노를 회의할 생각은 없다. 부당한 분노도 아니거니와, 격노라고 해봐야 씩씩거리며 지우개로 밑줄을 박박 지우는 정도의, 참으로 사소한 화이니 말이다.
책에 밑줄을 긋는 건 그 내용을 장기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훌륭한 방법 중에 하나다. 그 행위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순 없다. 다만, 그게 자기 소유의 서적일 때에 한정된다. 3M에서 플래그란 상품을 출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책에 밑줄을 그었다.
기억에 관한 심리학 연구에 기초를 닦은 심리학자 도널드 브로드벤트 Donald Broadbent는 '선택적 주의 selective attention' 개념을 제공했다. 지각된 정보를 장기 기억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요 정보에 '주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밑줄을 긋는 행위로 인해 밑줄 그은 정보/긋지 않은 정보의 '선택'이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퍼거스 크레이크 Fergus I. M. Craik와 로버트 록하트 Robert S. Lockhart의 '정교화 수준 이론 Levels of Processing'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정보가 부호화되는 깊이에 따라 기억의 강도가 결정되는데, 밑줄 긋기는 단순 읽기 작업을 능동적 처리로 바꾼다는 것이다. 정보의 중요도를 판단하고 처리함으로써 장기 기억으로 전환이 더 쉬워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반 리스코 Evan F. Risko와 샘 길버트 Sam Gilbert의 '인지적 오프로딩 cognitive offloading' 이론도 참고할 만한다. 인지적 오프로딩은 뇌의 제한된 작업 기억 용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외부 자원을 사용하여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본능적, 전략적 행동이다. 메모하기, 달력에 일정 기록하기, 계산기 사용, GPS 내비게이션 사용 등이 모두 인지적 오프로딩에 해당한다. 밑줄 긋기는 "이게 중요한 거다"라고 지정해줌으로써 기억 부담을 줄이고 이해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Cognitive offloading is “the use of physical action to alter the information processing requirements of a task to reduce cognitive demand”
Risko, E. F., & Gilbert, S. J. (2016). Cognitive offloading.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20(9), 676–688.
배리 지머만 Barry J. Zimmerman의 '자기조절 학습 self-regulated learning' 이론까지 가는 것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조절 학습은 학습자가 목표 달성을 위해 능동적으로 인지적, 동기적, 행동적 전략을 활용하여 학습 과정을 스스로 조절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이해했다 /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메타인지가 학습 효과를 높인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 Richard H. Thaler의 소유효과 endowment effect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어떤 대상을 ‘소유'하게 되는 순간, 그 가치를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밑줄을 긋는 것으로 그 지식이 나의 소유가 되었다는 '능력의 착각 Illusion of Competence'에 빠지게 되지만,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 장서는 공공재이고, 거기에 밑줄을 치는 행위는 공공재를 사유화하는 부덕한 행위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다. 규범 위반 행위는 대체로 위반에 따른 제재에 비해 위반으로 인한 이익이 클 때 이루어진다. 도서관 책에 낙서했다고 욕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심리적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임은 범죄경제학적으로도 자명한 일이다. 단순히 장기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한 학습 행위로서의 밑줄 치기 이상의 '변태적 심리'가 존재하고, 그 변태적 욕망이 충족되기 때문에 굳이 해서는 안 될 짓이란 걸 알면서 밑줄을 긋는 것일 테다.
우선은 심리적 소유감 psychological ownership의 과잉 확장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존 피어스 Jon L. Pierce, 타티아나 코스토바 Tatiana Kostova , 커트 더크스 Kurt T. Dirks의 심리적 소유감 이론은 사람이 어떤 물건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대상과의 감정적인 연결성 혹은 자기 정체성과 연관시키는 경험이라고 정의된다. 사람은 물리적 소유가 없어도 대상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건데, 세일러의 소유 효과의 심리적 확장판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빌런들은 책을 읽고, 이해하고, 밑줄을 긋는 것으로 그 책이 '내것'이 되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문화유산에 낙서를 하는 빌런들의 쓰레기 같은 행동 역시 이런 심리에서 연장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도서관 책은 공공재라는 사실보다, '지금 여기 내가' 지적 활동인 독서를 하고 있는 나의 소유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공공재에 낙서하는 부덕한 행위는 '지식의 보고에서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숭고한 행위'로 포장된다. 그렇다 보니 '낙서'가 아닌 '칭찬받을 지적 행위'라는 자기정당화 self-justification가 완성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자뻑은 '내가 다음 사람들을 위해 주요 내용을 선별해주었다'면서, '이로써 다음 독자의 독서에 도움을 주었다'는 나르시시스트적인 개소리 bullshit이 가능해진다.
첫 번째 이유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보편적인 도덕감이다.
공공재인 도서관 책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출자는 책을 깨끗이 읽고 반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 보니 밑줄 긋기만큼이나 도서의 훼손과 파손, 변형에도 똑같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두 번째 이유는 도덕적 과시Moral Grandstanding일 테다.
저스틴 토시 Justin Tosi와 브랜던 웜키 Brandon Warmke의 도덕적 과시 개념은 "자기 홍보와 사회적 지위 획득을 위해 공적인 도덕 담론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더욱 민감하고 정의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점점 더 강하게 펼치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건데 "주변 사람들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이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하거나 타인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또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명백하게 틀렸다고 주장하는 등 과장된 감정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도서관 책에 밑줄 긋는 빌런들을 욕함으로써,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외치는 꼴이란 게다.
세 번째 이유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잭 브렘 Jack W. Brehm의 '심리적 반발 Psychological Reactance'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자유로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서, 외부의 압박이나 금지 등으로 인해 그 자유가 위협받거나 제한당한다고 느낄 때, 자신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동기가 생긴다. 쉽게 말해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가 생긴다는 거다. 독서라는 행위의 기본은 텍스트와 독자 상호 행위다. 제3자가 필요하다면, 해설서를 찾아 읽으면 그만인다. 같잖은 아마추어의 어설픈 평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네 번째 이유는 존 스웰러 John Sweller의 인지부하이론 Cognitive Load Theory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인지 부하 이론에 따르면 내재적 인지 부하는 학습 내용 자체의 난이도와 복잡성으로 인해 발생하며 학습 내용을 잘 분류하고 단계적으로 소화함으로써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반면 외재적 인지 부하는 학습 내용이 학습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부하로 최소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빌런들의 밑줄은 독서 경험에 적잖은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필필요한 외부 부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요즘 플래그 상품 좋은 거 많이 나온다. 제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자.
문화유산에 낙서하는 골빈 인간들처럼, 도서관 책에 밑줄 좀 긋지 마라.
그리고 그을 거면, 제발 연필로 그어라. 연필이면 지우개로 지우면 그만인데, 볼펜과 형광펜까지 쓰는 빌런들을 만나게 되면 욕을 참을 수가 없다. 제발 사람답게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