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라디오스타
2006년 가을, 한 개봉관에서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스타>를 봤다. 왕가위 감독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보는가가 영화의 완성이라고 했다. 나는 그 때, 혼자서 <라디오스타>를 감상했다. 신파극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에는 대마초 사건으로 나락에 떨어진 왕년의 가수왕 박중훈과 안성기의 브로맨스가 펼쳐지고, OST '비와 당신'이 있다. 엔니오 모리코네를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시네마 파라디소(Cinema Paradiso)'OST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박중훈이 부른 '비와 당신'은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만큼은 호소력이 있었다. <중경삼림>의 OST로 수록된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 못지않은, 귀에 익은 가요 명곡들도 흘러나왔다. <라디오스타>는 제목부터가 복고풍이다. 영상매체 때문에 라디오스타의 시대는 끝났다며 라디오의 종말을 고하는 버글스의 그 유명한 'Video Kills The Radio Star'에서 따왔다고 한다. 음악영화 시리즈를 제작하겠다는 이준익 감독이 첫 테이프를 끊은 작품이다. 그리 새로울 게 없는 설정인데도 영화는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밴드 노브레인이 동네 밴드 '이스트 리버'로 나와 생생한 음악을 선사했고, 디제이 박중훈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추억이 깃든 명곡들을 선사했다. 극 중 노브레인이 공연하는 라디오 공개방송 신을 보다가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았다. '영화 속 음악과 인물을 스크린 밖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왕가위 감독의 말대로, <라디오스타>를 나만의 방식으로 완성시키고 싶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우리만의 공간에서 라디오를 아끼는 청취자들과 함께 따로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하이닉스 콘서트홀을 극장 삼아 대관했다. 기왕이면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극장가에서 영화가 종영되기 전에 상영할 수 있도록 서둘러 프린트 확보에 나섰다. 다. 그런데 작품이 아직 극장가에 걸려 있는 중이라서 필름 임대가 만만치 않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상영 중인 영화 프린트 임대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극장가 스크린에서 서서히 작품이 내려지기 시작할 무렵, 영화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의 협조로 프린트를 임대할 수 있었다. DVD가 아닌 필름으로 상영하기 때문에 영사기가 필수다. '아트시네마'라는 기획사를 운영하는 김정길 대표가 선뜻 영사기를 내주기로 했다. 김 대표는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 군민회관 같은 곳에서 영화 상영을 해온 기획자였다. 날짜를 정하고 입장권을 만들고 스폿도 제작해 홍보를 시작했다. 대우꿈동산 아이들과 사회복지사를 특별 게스트로 초청하고 좋은 자리를 비워뒀다. 나머지 객석은 조이 콘서트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몫이다.
오늘만큼은 콘서트홀이 시네마 천국이다. 객석 뒤로 아트시네마에서 공수해온 영사기가 우뚝 서 있다. 커다란 릴이 웅장해 보일 정도다. 시네마서비스에서 보내온 프린트는 모두 여섯 권. 프린트 한 권당 2천 자 분량이다. 보통 두 시간짜리 영화는 필름 분량이 1만 2천 자 정도 들어간다. 보통 이 정도 분량이면 영사기 두 대에 필름을 나눠 감고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영화를 상영하다가 첫 번째 영사기의 릴이 다 돌아가면 타이밍을 맞춰 두 번째 영사기를 돌려야 한다. 김정길 대표는 자신이 아끼는 35밀리 토키와 영사기를 가져왔다. 토키와 영사기의 릴은 용량이 커서 릴 하나에 만 2천 자 분량을 한꺼번에 다 감을 수 있다. 프린트 여섯 권을 하나하나 거대한 릴에 정성 들여 감는 김정길 대표. <시네마 천국>의 영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김정길 사장은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중후하며 진중한 분위기가 알프레도 역을 한 필립 느와레와 많이 닮았다. 영사기에 필름을 걸고 음향을 점검하는 모습이 알프레도 그대로다. 김정길 대표의 손놀림을 바라보는 나는 알프레도 앞에서 필름을 펼쳐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토토가 되어 영사기 옆에 서 있었다. '시네마 파라디소'의 메인 테마가 귓전에 맴돌고, 영화감독이 된 주인공 토토가 알프레도가 남긴 선물인 키스 장면 영상을 바라보던 마지막 신이 어른거렸다.
그 순간의 설렘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그 느낌은 마치 어릴 적 살던 시골 동네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의 눈부심같이 특별했다. 여섯 살이던 1971년,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그땐 어두워지면 일삼아 호롱불 심지에 불을 붙여야 했다. 그래서 방이며 부엌이며 가는 곳마다 곽성냥이 하나씩 필수품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그 성냥이 말썽이었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는 장난만큼 신나는 놀이가 없었던 것. 불이 꺼지기 전 다른 성냥을 꺼내어 연달아 불을 붙이고 놀다가 아버지가 아끼던 유리 재떨이를 쩍 갈라지게 한 사고를 쳤다. 성냥을 얼마나 그어댔으면 그 열 때문에 유리 재떨이가 쪼개졌을까. 전기가 들어오게 되면 호롱불을 켜기 위해 성냥 그을 일도 없어진다. 아쉽지만 전기불이 들어온다는 일이 더 신나기는 했다. 낯선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와 애자를 달고 전선을 설치하고 다녔다. 집집마다 두꺼비집을 달아주고 처마 밑에 백열등을 매달았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저녁 어스름한 무렵 전기가 들어왔고, 온 동네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어른들이 동네 농악대를 꾸려 집집마다 돌면서 풍악을 울렸을 만큼 시골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잔치 같은 날이었다. 아이들도 눈밭의 강아지처럼 신나게 뛰어다녔다. 늦은 밤까지 골목에서 놀아도 어른들이 뭐라 하지 않았던 축제 같은 밤이었다.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혀준 전깃불을 바라보던 그 날처럼, 나는 토토의 반짝이는 눈빛이 되어 설레는 맘으로 알프레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콘서트홀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아무래도 영화를 관람하기에는 영화관보다 부족한 여건인만큼 개봉관에서 봤던 느낌 그대로 재현될지 불안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콘서트홀의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르고 있는 하얀 은막, 천정에서부터 내려져있는 저 스크린이 오늘의 승부처인 셈이다. 빈자리가 거의 채워졌을 때 남은 조명을 마저 껐다. 정적이 흐른다. 리허설은 완벽했는데, 혹시라도 영상만 나가고 소리가 안 들리는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마지막으로 35밀리 토키와 영사기의 음향을 체크했다. 암전 속에 침묵이 흐를 때 음향감독이 이상 없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영사기 스위치에 손을 올린 채 기다리는 김정길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큐!” 사인을 내렸다. “찰칵!” 소리와 함께 영사기가 차르르르 돌아가고 영사기에 장착된 3킬로와트 크세논램프가 강력한 빛을 뿜어낸다. 필름을 투과한 램프의 빛은 눈부시게 하얀 빛줄기가 되어 관객들의 머리 위를 지나 은막을 향한다. 스크린에 당도한 빛의 입자가 영상으로 살아날 때 경쾌한 음악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온다. 무사히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영월과 동강 사행천의 풍광은 우리만의 극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정겹게 쏟아지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라디오스타>는 어떻게 보면 특별할게 별로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몰락한 스타와 그 스타를 챙기는 매니저간의 브로맨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매니저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몇 번이고 재기를 시도해보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면 눈곱만큼의 참을성도 없는 알량한 스타 기질 때문에 번번이 낭패를 맛본다. 여기에 영월 사람들의 순박한 시골 정서가 배경으로 깔리고 눈물샘을 자극할 장치 몇 가지가 전부다. 그런데도 관객들의 마음을 단번에 훔쳤으니 대단하다. 극 중에서 박중훈이 직접 부른 노래 ‘비와 당신’이 한동안 음악차트 순위에 올랐고 감성을 자극하는 몇몇 대사들도 여운을 남겼다.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이런 소소한 대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영월의 동강을 그대로 직역한 밴드 이름 '이스트리버'. 작명부터가 귀여운 데다 노브레인 멤버들이 직접 이스트리버로 출연한 것이 화제였다. 울다웃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때, 스크린 뒤쪽 무대에서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온다.
“넌 내게 반했어~”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르며 천정에서부터 내려진 스크린이 올라가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 '이스트리버'가 영화 속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조금 전까지 영화 속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밴드 '노브레인' 이 자신들의 히트곡을 연주하며 실제 콘서트 무대를 화려하게 열었다. 리드보컬 이성우가 “넌 내게 반했어!”를 목청껏 소리친다. 노브레인과 <라디오스타> 콜라보였다. <라디오스타>는 그렇게,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완성된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설렘으로 시작한 일들은 언제나 근사하게 이뤄졌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세상을 바꾸는 라디오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