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가을, 공동묘지
영혼의 단짠이 필요할 때
김밥을 만들었다.
느끼한 걸 그리 많이 먹지 않았지만 뻔한 집 밥에 권태를 느꼈다. 그렇다고 김밥이 대단한 음식은 아니겠지만, 집에서 만든 김밥이 내가 아는 국내 최고의 김밥이다. 10년만 젊었으면 프랑스에 가서 김밥집을 차리겠다고 했을 거다.ㅎ
밥에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넣어 단짠을 맞추고, 계란 지단을 넓게 만들어 다른 재료들을 감싸주어 비주얼과 부드러운 맛을 조화롭게 만들어 냈다. 이번엔 시골집에서 직접 짠 참기름을 김밥의 전신에 경락 마시지 하듯 어루만져 주었더니, 입에 넣는 순간 코에 전해지는 향까지 예술이다.
예년 같았으면 진한 커피 한잔을 들고 홀가분하게 정한 곳 없이 떠나, 냉랭한 공기 속에서 잠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왔을 텐데. 코로나로 위축된 의식이, 궤도 밖으로 튀어 나갈 몸부림을 사전에 제지하듯 선을 그어버린 듯하다.
내일 이른 아침엔, 외국인 공동묘지에 다녀올 계획이다. 머리가 혼란스럽거나 삶의 공허와 권태와 주저함을 발견할 때, 인생의 목표가 흔들거릴 때 들러서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당위성의 스탬프를 받아 오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
여명이 밝아오는 조용한 이국적인 공동묘지를 거닐며, 묘지마다 각자 다르게 조각된 십자가와 묘비명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던 기간과 그들이 남긴 것들을 꼼꼼히 둘러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그들이 남긴 것이라고는 그들이 사랑했던 가족과, 그들을 사랑했던 가족들의 이름들 뿐이다.
많은 것을 남기려고 발버둥 치며 상처에 뒤덮인 삶이었겠지만, 돌아오지 않은 긴 여행을 떠난 이 여행자들이 생전에 욕망하고 의식의 표면에 그렸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지독한 에고이스트였건, 체 게바라처럼 타민족의 해방까지도 사랑했던 박애주의 자였건.
생이 슬픔으로 귀결될지, 환희와 초월로 귀결될지는 그때에 가봐야 알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 오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를 잊고 사는 생활, 미래에 대한 흥미, 내 자신에 대한 탐구, 날카로운 감수성의 장전 등...
김밥 하나 만들어 먹고 이렇게 길게 주저리주저리 하다니. 아, 여기 어디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