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 서동의 여의주가 되다
다시 읽는 서동설화
영웅의 탄생
좋은 이야기는 오래 기억된다. 오래 기억되는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다. 한 주인공이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고귀한 신분이거나,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주인공은 고난을 겪는다. 고난은 힘들수록 좋다. 비범함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성장하면서 그는 시험에 들게 된다. 그는 (우연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거나, 어떤 도전에 자(타)의 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에겐 어김없이 조력자가 등장한다. 조력자는 동물이거나, 가난한 노인, 괴팍한 스승, 정체를 감춘 어떤 존재다. 조력자는 주인공이 시험을 통과하는데 도움을 준다. 결국 주인공들은 시험에 통과함으로써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서동)의 어머니는 과부다. 정식 혼인관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결핍된 영웅의 출생이다. 서동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낭중지추처럼 서동의 비범함을 금세 드러난다. 서동은 사람들의 칭찬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고 적국인 신라로 떠난다.(영웅의 모습이 발현되는 지점이다.)
서동은 ‘창의적’으로 선화공주를 출궁 시킨다.(조력자 1 아이들) 공주와 혼인한 후에는 그녀의 도움으로 뒷산에 흙덩이처럼 쌓인 금의 가치를 알게 된다.(조력자 2 선화공주) 서동은 여기서 얻은 금덩이를 신라의 진평왕에게 보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조력자 3-지명 법사) 드디어 서동은 왕이 된다.
무왕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일국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 무왕 부부가 사자암으로 가는 길에 연못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타나서 계시를 준다.(조력자 4-미륵 삼존불)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절을 짓는다. 드디어 무왕은 미래의 부처가 사는 미륵사를 지음으로써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무왕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실존인물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당대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서동의 아버지가 용으로 설정된 데에는 당대인들이 가진 공통된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신화화되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 용은 비를 부리는 신비한 동물로 상상된다. 용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왕가의 핏줄’이라는 특별한 신분을 암시한다. 용은 곧 왕의 상징인 것이다. 백제인의 무의식이 은유화되면서 무왕은 용의 아들로 승인된다.
한고조 유방의 탄생 신화도 비슷하다. 한고조의 어머니 유온이 연못가에 쉬고 있는데 신과 만나는 꿈을 꾸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캄캄해졌는데 남편인 태공이 보니까 아내인 유온의 몸 위에 교룡이 있었다. 그로부터 유온은 태기가 생겼고 낳은 아이가 후에 한고조인 유방이 되었다. 한 나라의 시조가 되거나 재창건의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면 특별한 탄생 신화를 갖는다. 제왕의 권위가 그를 신성성의 상징인 용의 아들로 만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서동이 ‘어려서부터 재기와 도량이 컸다’고 전한다. 서동의 영웅적 기질은 머리를 깎고 적국인 신라로 떠났을 때에 드러난다. 평범한 인물이 영웅으로 각성하게 된 계기가 ‘제일 예쁜 여자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라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예쁜 여자를 보고 싶은 사내는 많아도, 적국까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머리를 깎는 행위’는 특별한 각오를 보여준다.(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머리를 깎는 비장한 신을 떠올려 보라!) 백제의 30대 왕으로 즉위한 무왕은 선대왕들이 줄줄이 단명하던 국가의 위기에서 ‘왕 중의 왕’, 선택된 자로 자리매김되어야 했다.
만들어진 이야기들
평범한 시골 청년인 서동이 왕위에 오르려면 뭔가 특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서동이 머리를 깍지 않았다면 그저 마룡지 근처에서 시어머니를 잘 모실 심성 착한 처녀를 만나 그럭저럭 살았을 것이다. 서동은 머리를 깎고 적국인 신라로 찾아간다.(궁예도 머리를 깎고 미륵부처의 화신이라 하여 왕이 되었다.) 서동이 퍼트린 가짜 뉴스에 신라 왕실과 선화공주는 곤란하게 됐다. 당시로선 혹세무민 한 죄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 서동의 작전은 다행히 성공한다. ‘서동요’를 열심히 불러댔던 ‘댓글부대’의 덕분이다.
날조된 소문의 역사는 의외로 역사가 깊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와의 허위정보를 로마에 퍼트려 권력을 차지한다. 최은창은 <가짜 뉴스의 고고학>에서 불과 18세의 나이에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무기는 심리전이었다고 지적한다. 진실은 더디게 전파되지만 가짜 뉴스나 허위정보는 자극적일수록 빠르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된 때는 상황은 이미 거스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서동은 노래라는 매체를 활용해서 거짓과 허위정보를 파급시킨 심리전의 귀재였다. 그런데 서동설화의 독자는 백제인이 아니었을까? 그가 백제인에게 이야기를 퍼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동의 이야기에 동의하고 전파한 당대 백제인들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서동설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동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라는 충분조건 보다, ‘왜 왕이 될 수밖에 없었나?’라는 필요조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쫓겨난 딸은 선화공주만이 아니야
삼공본풀이는 제주도에서 큰 굿에서 구연되는 무속신화다. 삼공본풀이에 등장하는 감은장애기는 이야기는 ‘내 복에 산다’, ‘쫓겨난 딸’의 민담의 형태를 갖는다. 이 민담은 아버지에게서 쫓겨 난 딸이 가난한 남자를 만나 자신의 지혜로 부자가 되어 부친과 재회한다는 내용이다.(예나 지금이나 딸들은 아빠 마음을 모른다.)
‘쫓겨난 딸’ 모티브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 <삼국사기>의 ‘평강공주와 온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물론 몽골의 <조홍마>, 일본 <숯구이 고고로> 등 동아시아의 민담에도 널리 등장한다. 그런데 ‘쫓겨난 딸’의 상대가 숯구이 총각이 아니라 마퉁이로 설정된 것은 우리 민담에서 <무왕>과 <삼공본풀이> 뿐이다. 이야기 원형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는 무가의 특징이 감안하면 이러한 유사성은 의미심장하다. 샤먼과 같은 통찰력을 가진 여성과 능력이 발휘되기 전의 남성의 결합, 그리고 부친(지배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고대 사회구조의 변화가 서동설화의 모티브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삼공본풀이>의 감은장애기는 인간의 운명 혹은 팔자를 관장하는 신이다. <삼국유사>의 선화공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용의 아들(서동)을 승천케 하는 여의주(선화)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선화공주의 존재는 거짓 소문의 피해자, 혹은 무왕의 조력자로만 머무르기엔 해석의 여지가 크다. 예컨대 서동의 삶은 선화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기 때문이다. 선화는 서동에게 ‘흙더미처럼 쌓여있는 금’의 가치를 알려주었고, 후에 미륵사 건립을 발원한다. 금의 가치를 발견케 한 것이 무왕에 오르게 한 계기가 되었다면, 미륵사 건립은 불법의 수호를 받아 영원한 대왕으로 옹립된다.
무왕 설화의 의미
서동설화는 미륵사 건립으로 귀결된다. 즉 미륵사라는 세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과정으로서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사망한 후에도 자신이 남긴 업적 등이 여전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거나 바란다. 그래서 죽음을 초월한 상징적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문화를 만든다. 죽음의 공포가 가까울수록 문화 생산 욕구 또한 강해진다. 그래서 죽음에 직면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도 강화된다. 서동설화는 당시 거듭된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세기의 건축물을 만든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여의주는 용의 권능을 상징한다. 용은 여의주라는 구슬이 있어서 하늘을 날고, 비를 내릴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선화공주는 서동에게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었으며 서동설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야기 구조상 무왕 신화가 완성되는 그 지점에 미륵사 건설에 있었다. 용에게 여의주가 필요하듯, 무왕 신화가 완성되기 위해선 ‘미륵 삼존불의 현시’를 통한 미륵사가 건립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웅은 이전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룬 자다. 무왕 신화에서 미륵사 건립은 무왕이라는 용의 몸체를 의미한다. 지붕 위에 올린 기와가 용의 비늘이라면 탑 아래 심주석에 모신 사리장엄은 여의주에 해당한다. 서동의 이야기가 무왕의 등극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