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외로운 것은 전부를 걸기 때문이다.'
# 신화의 시작
신이 태어났다면 제일 먼저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존재를 기억시키기 때문이다. 오래된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탄생이다. 주인공의 출생부터 특별하다. 부모가 고귀한 신분이었거나 평범하거나, 마땅히 누려야 할 무엇이 없거나, 빼앗긴다. 아무튼 주인공은 떡잎부터 다르다.
어린 시절의 영웅의 고난은 통과의례다. 고난은 힘들수록 좋다. 고통을 이겨내면서 주인공의 비범함이 드러나니까? 자, 당신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누구를 떠올렸나?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내게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야기의 취향은 곧 이성 취향 또는 어떤 가정의 출신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이야기는 독자의 결핍에 따라 선호하는 장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익산에 전승되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무려 천사백 년 동안 내려온 이야기다. 한 이야기가 이토록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곧 그 지역민의 결핍의 증거다. 이야기의 시작은 백제 왕가 중 수많은 왕재 중 하나인 ‘부여 장’에서 시작한다. '부여'가 성이요. '장'이 이름이다. '장'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는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장'은 왜 용의 아들이 되어야만 했을까? 생각해보자.
# 외로운 사내, 무왕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서동이 어렸을 때 ‘재기(才器)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내용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또 어렸을 적에 ‘도량이 컸다’는 주장도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 서동의 영웅적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선 특별한 스토리가 필요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뜬금없이 예전에 고생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서동이 사람들의 칭송에 만족하지 않고 적국인 신라로 떠난 이유다.
서동은 서라벌에 가서 영웅의 자질이 발현된다. 그런데 왜 하필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가 아니고 서라벌이었을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선화공주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국경을 넘는 무모한 도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어쩌면 서동은 부여에 사는 귀족층에게 과시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한 사람은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는 영웅만이 할 수 있는 것. 마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나 나올 법한 이성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 같은 것. “사랑이 외로운 것은 운명을 걸기 때문이다.” 서동의 노래인 <서동요>는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로 오늘의 이야기인 서동설화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밤에 뭘 안고 가다(夜矣 夗[卯]乙抱遣去如).
서동이 운명을 건 노래가 바로 이 <서동요>다. ‘선화공주가 남몰래 서동과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은 신라 왕실을 곤란하게 했다. 이른바 가짜 뉴스다. 서동은 공개 수배되어 혹세무민의 죄로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 서동의 작전은 다행히 성공한다. ‘서동요’를 열심히 불러댔던 ‘댓글부대’ 덕분이다. 서동은 노래라는 매체를 활용한 심리전의 귀재였던 것이다.
소문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와의 허위정보를 로마에 퍼트려 권력을 차지한다. 최은창은〈가짜 뉴스의 고고학〉에서 불과 18세의 나이에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무기는 심리전이었다고 지적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된 때는 상황은 거스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진실은 더디게 전파되지만 가짜 뉴스나 허위정보는 자극적일수록 빠르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서동 신화에서 ‘사랑의 모티브’를 제거하면 전략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무왕은 단신으로 적국인 신라에 침투하여 적국의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심리전을 펼쳐서 신라의 공주를 출궁 시키고 ‘포섭’하여 데려왔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무왕이 신라와의 수차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무왕이 용의 아들인 된 이유
용 신화는 농경문화에서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용은 비를 부리는 신비한 동물로 상상되었다. 민중들은 농사를 짓는 데에 꼭 필요한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믿었고, 하늘의 권능을 위임받은 왕은 곧 용의 화신으로 상상되었다.
용은 왕을 은유한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이라고, 임금의 씨앗을 용포라 한다. 이 점에서 금마면 소재지를 흐르는 개천의 이름이 옥룡천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도작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비를 부르는 용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무왕은 농경민족에게 꼭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로 각인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도 계룡이 옆구리로 낳았고, 벽사의 주인공 처용도 동해용왕의 일곱째 아들이다. 용과 관련된 탄생은 뭔가 평범하지 않은 혼인과 출산의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용을 제왕의 권위와 신성성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한고조 유방의 탄생 신화도 용과 관련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한고조의 어머니 유온이 연못가에 쉬고 있는데 신과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주위가 캄캄해졌는데 남편인 태공이 와서 보니까 유온의 몸 위에 교룡이 있었고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서 낳은 아이가 유방이라는 것이다.
한고조 유방이 자신의 출생을 태공이 아닌 교룡의 아들로 포장한 것은 통일 국가의 전제군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아버지의 신분을 지움으로써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시도처럼 말이다. 무왕의 탄생 신화는 한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통일 군주가 왕위로 등극한 이후에 벌인 신화 조작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무왕의 이야기에는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권력 의지의 지향점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백제 바깥의 세상, 신라와 고구려, 중국과 왜에 대한 국제적 위상을 드 높이기 위해 용 신화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왕은 자신의 사후에 백제 왕실의 미래를 구상했다. 그것은 미륵사를 통한 영원한 제국의 번창이었고 이것의 시작이 '용의 아들의 탄생'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