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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Jul 06. 2020

비 오는 날, 이발소에서는 연필 깎는 소리가 난다

나는 '회현'에 산다. 회현은 면소재지가 있는 농촌마을이다. 면사무소 앞 100여 미터 정도가 중심가이고 나머지는 논과 밭이다. 면소재지를 통과하는 중심 도로를 마주하고 회현 슈퍼와 현대 편의점이 있고 통닭집과 백반집이 나란하다. 이 작은 마을에 이발소가 두 곳 있는데 '회현 이용원'과 '금광 이용원'이다. '금광'은 이곳이 금광리여서 붙여진 이름. 이발소 두 곳 모두 이름 짓기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은 듯하다.

 
나는 '금광 이용원'을 가끔 이용한다. 이곳은 마을 사랑방을 겸하고 있어서, 어느 저수지에 고기가 잘 잡힌다던지, 쌀 수매금이 어떻게 된다든지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가끔 마을의 실력자(?)들이 모이는데, 그때마다 어르신들은 얼큰하게 한 잔 걸친 상태다. (가끔 주인아저씨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술판을 벌이기 일쑤다.) 하여, 선거철이 돌아오거나 마을 행사가 있는 날이면 '금강 이용원'은 북적하다. 




비 오는 오후 외부 일을 마치고 일찍 퇴근했다. 사무실에 돌아가 봤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컴퓨터 수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금광 이용원'을 찾아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발소를 다시 찾을 짬이 나지 않아서, 근처의 '회현 이용원'을 가게 되었다.


이용원에는 아버지뻘 되는 어르신이 흰 와이 셔쓰를 단정히 차려 입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깎을 수 있냐'라고 묻자 TV 리모컨을 든 손을 들어 말없이 이발용 의자를 가리켰다. 오래되어 쿠션이 내려앉은 의자에 앉았다. 이발사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절제된 동작으로 이발 준비를 하였다. 이발소 유리창에 빗줄기가 빗금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발사의 가위가 지날 때마다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났다.  유리창에 긋는 빗줄기처럼 머리칼이 잘렸다. 사각사각, 주룩주룩, 머리 깎는 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나는 아버지를 따라 머리를 깎으러 온 열한 살  아이가 되었다. 이발소 의자의 팔걸이에 나무판을 대고 앉아서 잠결에 조으며, 가위가 지나가는 대로 머리를 기울던 어린 나.....



 갑자기 문이 열리고 베레모를 쓴 신사 한 명이 들어왔다. 베레모는 이발사와 오래 아는 사이 같았다. 주인은 눈으로만 아는 체를 하고, 내 머리 깎는 데만 열중했다. 손님을 반기는 것은 이발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이발소에 접한 미닫이 문을 열고 나와서, 커피를 내오며 손님을 반겼다. 나는 그녀가 이발사와 마흔네 해 전에 결혼한 사실과, 결혼 열 달 만에 신랑이 입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면회 가는데 배 속에 첫 애 있었어라, 부른 배를 보고는 면회시켜줍디다.... 군부대 면회실에서 가수 조영남이를 그때 처음 봤는데, 조영남이 타 준 커피도 마셨어요.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못 생겼더라....."

이발사의 아내는 아가씨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때 이발사의 어깨도 조금은 흔들렸으려나?...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다. 무슨 동굴 속에서 울리는 소리 같은 것, 이발사 아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손님이 말했다.

"어~ 잘 있었냐?",

방 안쪽에서 더 큰 소리가 났다. 반가운 울음 같기도 하고, 어리광 피우는 아이의 비분절음같기도 한 소리. 나는 그때 면사무소 거리를 뒤뚱거리며 뛰어가던 아이가 생각났다. 마음이 열한 살에 멈췄으나 몸은 스무 살로 커버린 아이와 그를 쫓아가는 노인을 본 기억이 났다.  

어느덧 이발이 끝났다. 3:7 가르마를 얌전히 머리에 얹은 사내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오래전 나를 데리고 이발소로 왔던 젊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는 면회 온 각시를 보며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 이발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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