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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Oct 30. 2020

익산의 계절

익산의 작가들

# 익산의 정체성은 익산역에서 흐른다

익산은 문화의 플랫폼이었다.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통해 외부 문화 유입이 수월했다. 자연히 익산인은 시대정신의 변화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체감했다. 


문화적 변화의 시기가 오면 익산인들은 과감히 도전과 응전을 선택했다. 익산의 문화적 유산들은 이러한 긴장과 경합의 문화적 충돌에서 빚어낸 창조품이었다. 하여 익산의 문화적 계절을 말하자면 가을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시간의 결실이 모두 수확되어 버린 가을, 익산은 미래를 위해 문화의 씨앗을 보관해야 한다.


익산의 시간은 익산역에서 흐른다. 익산역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모순이 충돌하는 장소다. 19세기 말 산업 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안정적인 식량 수급처를 찾았다. 이웃나라인 조선이 선택됐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제일 먼저 철도를 부설했다. 1911년 3월 착공하여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이 놓였다. 철도 건설은 쌀 수탈을 통해 중공업 일제가 그린 기획의 밑그림이었다. 호남의 중심에 이리역이 건설되었다. 이리역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첫 번째 퍼즐이었다. 이리역은 식민지 도시로 이리의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대표적인 작가가 가람 이병기다. 그는 ‘시조를 혁신’하여 새로운 시조 문법을 만들었다. 가람은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절에도 정신적 여유를 지향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가람을 비롯한 회원들이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취조받으러 나갔다 들어오면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그 상황에도 가람은 농담을 하여 회원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람에게 해학은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이러한 여유와 포용의 힘 덕분에 가람은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도 중개자가 됐다.   

   

해방 이후 철도를 통해 타지에 있던 이들이 귀국하여 익산에 정착했다. 익산은 예로부터 다양한 문화적 특질들이 융합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지인이 정착하기 좋은 장소로 익산을 선택했다. “강경을 지나면 함열버틈이 전라도니라. 함열, 황등, 이리 그런데, 전라도루 들어서 이리가 젤 크니라. 클 뿐 아니라 전라남도루 가는 것이 아니구, 전라북도루 가서 농사할 고장을 찾는다면 누가 됐던, 이리서 내리는 게 순설 거다.”(채만식 ‘소년은 자란다’)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사람들이 익산역으로 모여들었다. 익산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희망의 장소였던 것이다.       


# 이리역을 기록하는 작품들

익산의 작가들은 ‘이리역 폭파사건’을 빠짐없이 다룬다. 이리역 폭파 사건은 ‘시대의 트라우마’였다. “하기야 그 순간 이리시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날 그 순간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박범신 『더러운 책상』)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것 같은 폭음이 터지면서 우지끈 집채가 흔들리고 와장창 창틀이 떨어지면서 유리조각이 분가루처럼 쏟아졌다.(홍석영 「인철네 집」) “원자폭탄 터지딧기 화약열차가 어마어마헌 파괴력으로 시내 중심부를 초토화허는 바람에 해묵은 숙원사업이던 도시계획들을 과감허니 추진 헐 수가 있었지.”(윤흥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도시 발전이 30년 앞당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미담만 남은 건 아니다. 폭발사고로 연고를 찾을 수 없는 윤락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익산역 인근에는 성매매 업소가 대규모로 있었던 것. 주민등록도 없기에 그녀들에 대한 보상금 또한 없었다. 작가들은 윤락여성들의 죽음을 기억했다. 성매매 여성의 삶은 서민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학동 굴다리’처럼 익산역의 어두운 과거를 굽이쳐 감고 있다. 송학동 굴다리는 일제가 만든 길이다. 지금은 구도심과 도시의 외부를 연결한다. 송학동 굴다리를 지나면 익산의 과거로 갈 것만 같았다.     


소설가 박범신은 송학동 굴다리에 대해 “이리역의 음습한 지하보도는 철인동 언덕배기로 이어져 피고름 흐르는 부스럼으로 피었다”다고 섰다. 그 길은 어두웠던 그러나 그 길 끝에는 희망이 숨 쉬던 역사 밖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하늘에 팽팽히 걸린 거대한 다리가 아니라 / 이리역 지하도는 굴다리, 땅속을 흐른다 / 이곳을 통과하려면 딱정벌레처럼 어깨를 접어야 하리 / …(중략)… / 이리의 동쪽과 서쪽을 흐르는 굴다리 / 우리가 살아 나온 80년대까지 역사는 / 춥고 어두운 공터로 엎드려 있다”(안도현 「이리역 굴다리」 부분)       

 

# 문화예술의 플랫폼, 익산

익산의 대표적인 문화예술품은 외부의 문화적 유산을 창조적으로 융합한 결과물이었다. 문화예술인들도 타지 출신들이 익산에서 최고의 작품을 창조했다. 고려시대  『입학 도설』을 지은 성리학의 거두 권근과  『성소부부고』를 쓴 조선 최고의 문장가 허균도 익산에서 시대를 견인했다. 해방 후 채만식과 이병기는 전통의 유산인 판소리와 시조를 혁신하여 현대문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렇듯 익산의 문화예술인들은 문화적 격변기마다 새로운 빛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열린 사고와 주체적인 시도를 받아주는 익산의 문화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익산의 문화예술을 한마디로 말하면 존중과 평화의 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평야지대의 문화적 기풍과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자신감은 다른 문화를 배척하지 않는 평화와 존중의 풍토를 조성했다. 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안도현도 타지 출신이다. 이들은 익산에서 습작기를 거치며 문화적 역량을 쌓았다. 어진 화가인 채용신도 익산에서 근대식 초상화 제작에 성공했으며, ‘석화제’의 신만엽을 비롯하여 소리꾼 정정렬 역시 익산에서 수련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하였다. 이들이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익산이라는 문화적 용광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이 어울려 시대적 문화예술을 창조했던 익산의 힘을 다시 보고 싶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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