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함이 단연코 최고다.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정말 단연코 최고였다.
사회적 압력을 겪어본 여성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이 여성작가는 디아스포라로
특히 라오스라는 아시아계 이민 2세로
그러한 날카로움이 벼려지고 벼려져서 마치 송곳과 같다.
낭중지추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터.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부모는 내전을 뒤로하고 미주로 이민을 갔으나
부모는 언어를, 문화를 알지 못해서 힘들게 버텼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식은
언어와 문화를 알지만,
문화 충돌과 차별을 겪었다.
부모의 고통을 눈으로 본 이들은
결코 그들을 상처 입힌
세계에 완벽히 융화되지도 못한다.
그 고통을
너무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집중력이 낮아진 나는 단편을 선호하는데
이 책은 그냥 여운이 너무 깊었다.
한 편 한 편이 사랑스러웠고
신선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개인적인 지표가 있는데
이 작가는 머신러닝으로 따지면
너무나도 많은 feature를 가지고 있고
심리학적으로는 세부적인 항목들로 인간을 바라본다.
본디 이렇게 복잡해지면,
무겁고 부하가 걸리기 마련인데
그걸 너무 세련되고
묵직하게 던지고 있다.
그냥,
너무 좋았다.
독서모임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날이 너무 기대된다.
짧은 책인데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을 표시한
인덱스로 도배되어 있다.
전부 다 좋지만
슬링샷과 지렁이 잡기는...............
꼭 읽어보기를
p.18
아빠가 저녁을 먹는 걸 보면서 아이는 그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또 뭐가 있을지. 아이는 아빠에게 어떤 글자는, 비록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대신 아이는 아빠에게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p.35
하지만 아름다움은, 그게 가져다주는 모든 것과 그걸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소란에 비해, 소지하고 유지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짐 같았다. 잃는 게 너무 많았다. 그 순간 레드는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 감사했다. 못생겼음에 감사했다. 못생겨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p.36
니콜은 거기에 있는 누구라도 붙잡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의 품에 안겨 서 있었다. 레드는 누간가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게, 그녀를 만지는 게 처음이었다. 두 여자는 울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에서였다.
p.53-54
그는 내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볼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내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후회하고 어리석게 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p.55
나는 그와 그의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짧았던가. 사십 년이었다.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고, 그는 기꺼이 끝까지 기다리고자 했다. 나는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고. 그 역할을 마치면 떠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그는 나를 잘못 봤다. 우리는 같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p.56
..., 그때 나는 여든 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못 본 척하고 돌아섰다. 멀리서, 아름답고 어둡게, 완전히 홀로 자전하며, 맑게 개어 있고 싶었다. 그가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것도, 내 이름을 부르는 외침조차도, 날 막을 수 없었다.
p.65
엄마는 언제나 답장이 오기를 바랐다. 이 나라에 오려고 했던 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그녀는 말했다.
p.68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돈을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빠는 상관하지 않았다. 엄마가 바라는 모습이 되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p.70
그는 반짝였다. 드문드문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들면 엄마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우리는 어둠 속 까만 점에 부과했다. 아빠가 우리를 콘서트에 데려오기 위해 치른 대가를 떠올렸다. 그가 다른 사람의 가구를 들어 올려 포장한 뒤 우리는 결코 살 수 없을 집으로 배달하던 시간들을. 랜디 트래비스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집으로. 우리가 낮은 곳에서 무대 조명이 그들의 머리를 비추었고 그들은 환히 빛났다.
p.71
엄마는 습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거의 매일 밤 카지노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서 잠을 잤다. 아빠는 그녀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주차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때때로 사람은 죽는다. 그 죽음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된 게 오히려 엄마에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p.78-79
레이먼드의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의 가슴을 쳤다. 소나기 빗방울 같은 작은 주먹으로. 설사 그가 더 나은 삶을 원치 않더라도 자신은 그걸 바란다고 말했다. 누나는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꺼냈다. 절박하게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랬다. "네 입에서 '아이스크림 스프링클을 뿌려드릴까요?' 같은 말이나 나오게 하려고 부모님이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폭탄으로 초토화된 나라 라오스에서 전쟁통에 망할 놈의 대나무 뗏목을 타고 떠나온 게 아니라고".
p.81
누나는 항상 그뿐만 아니라 모든 걸 돌보아왔다. 그녀는 거칠게 말했고, 실제로도 거칠었지만 마음씨는 착했다. 그 두 가지가 양립하는 게 가능했다.
p.83
그는 누나와 일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웃게 하는 법을 찾아냈다.
p.85
"젠장! 나는 운이 좋아봤자 2달러, 3달러 밖에 못 받는데. 네가 빌어먹을 남자라서 그래, 그렇지 않아? 내가 창업하고 소유한 사업장에서도 남자가 돈을 더 잘 벌다니. 그리고 팁을 뿌려대는 게 여자들이고. 그 여자들이 뭘 몰라!" 그녀가 화가 난 채 지켜보는 동안 레이먼드는 팁을 셌다. 그렇게 쌓인 팁은 종종 매니큐어와 페디큐어를 칠하고 번 돈보다 더 많았다.
p.89-90
"... 인생에서 내가 잘 아는 게 있다면, 그건 부잣집 여자들이야. 그 여자는 너랑 어울리지 않아."... 그녀가 오지 않으면 그는 손님들의 손톱을 모조리 미스 에일리의 손톱처럼 칠을 하고 모양을 냈다. 누구든 그녀일 수 있었다.
... 미스 에밀리가 들어와 자리에 앉자 그 남자의 향수 냄새가 따라왔다. 드러그스토어에서 파는 향수가 아니었다. 레이먼드는 알았다. 그런 곳에서 파는 향수를 전부 시도해 봤었다. 레이먼드는 작은 작업대 위에서 미스 에밀리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의 넓은 간극을 느꼈다. 그녀의 미소는 정중할 뿐 그 이상은 전혀 아니었다. 누나는 그가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았다. 링 위에서 패배를 예감하고 고개를 떨구던 때처럼.
p.91-92
"글쎄, " 그가 말했다. "있잖아, 미스 에밀리는 나 같은 남자는 절대 안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난 꿈꾸고 싶어. 기분이 좋거든. 오랫동안 그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어. 제길, 내게 기회가 없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그게 내가 헤쳐나가는 힘이야. 매시간, 매일을 헤쳐나가게 해. 나 같은 남자가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줄 필요 없어. 조금이라도 꿈꿀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 그는 자신의 얼굴과 누나의 얼굴이 닮았지만, 자신의 얼굴은 망가졌다는 걸 알았다. 찌그러진 코, 상처로 갈라지고 비뚤어진 왼쪽 눈썹. 마사지, 크림, 탄력 세럼으로 가꿔진 그녀의 얼굴은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지만 레이먼드는 그녀의 얼굴도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망가지고 비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인정하지도, 거기서 희망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희망은 그녀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든 그것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뜻했으므로.
p.104
"트릭-오어-트릿 하러 갔다는 말 아니니?"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줌마가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불쑥 튀어나온 크고 둥그런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퍼먼 아줌마. 치-카-치 했어요!"
p.109
그들은 고층 유리 건물의 사무실과 비서, 변호사, 사기꾼 세무사가 보호해 줄지 몰라도, 그가 소유하고 혼자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그가 사장이었다! 직접 소유한다는 것, "썩 꺼져! 전부 다! 지옥으로 썩 꺼져버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예전에 그가 들었던 말이었다. 상황이 역전되어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붓는 것, 그들이 냉정을 잃고 머뭇거리며 황급히 퇴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재미있었다.
p.115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착한 남자도, 좋은 남자도 아니라고,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때때로 사랑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느낌일 뿐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래,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p.124
나는 그녀가 가게 뒤쪽 방으로 초대되어 음식을 즐기고 싶었던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 가게를 떠나기 전 엄마가 계산대 직원들을 다시 흘끗 보고는 내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에그롤을 좋아했을까?"
p.125
"세상에 혼자인 사람은 없어." 내가 말했다. "누구나 항상 어딘가에 친구가 있어." 당시 엄마는 스물네 살이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어려 보였다. 그리고 더 작아 보였다. 나는 엄마를 지켜보았다. 때로 엄마는 악몽을 꾸었다. 숨 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짤막한, 겁에 질린 숨. 나는 손을 뻗어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p.127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냐."
나는 그때 엄마가 아는 걸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전쟁에 대해 알았다. 어둠 속에서 총을 맞는 게 어떤 건지, 품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게 어떤 건지, 폭탄이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곳,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면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p.128
우리는 서로 달랐고, 그때 우리는 그걸 이해했다.
p.129
엄마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렇지." 나는 그게 정말 질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잠든 어느 밤, 엄마는 여행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섰다. 아빠는 엄마가 떠나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p.130
그녀가 떠난 이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 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
아빠는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난민이 되었을 때 이 삶의 모든 비통함을 소진해 버렸다. 사랑을 잃는 것, 아내로부터 버림받는 것조차 사치였다-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p.139
스쿨버스 기사는 예전엔 어땠는지 돌이켜보았다. 아내가 커피타임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풍기던 냄새가 떠올랐다. 약간 탄 커피콩 냄새였다. 그는 대중교통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뒤로 아내가 더 행복해 보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선 시가 냄새가 났다. 프랭크의 시가였다. 약간의 금속과 먼지 냄새였다. 어쩌면 프랭크는 차 안에서 흡연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냄새가 그녀의 온몸에 배인 것이다.
p.141
아내에게 자신의 이름은 자이라고 다시 알려주고 싶었다. 라오어로 마음이라는 뜻이야!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아내는 이 나라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것이다. 아니면 그에게 영어를 연습하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선 아무도 자이가 마음을 뜻한다는 걸 몰라" 그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의 이름이 그런 뜻이라 한들 어쩌란 말인가? 영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였다. 이곳에서 중요한 유일한 언어는 영어였다.
p.148
딸은 행복해 보였다. 엄마가 되면 생명을 창조하고, 그 생명이 자기만의 길을 가는 걸 보게 된다. 그것이 엄마가 희망하고 원하는 바다. 하지만 그 일은 엄마가 없을 때 일어난다.
여자는 다시 자신의 차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차를 몰고 떠났다.
p.153
"셀린? 찬타카드가 어떻게 셀린이 되지?"
"이제 그게 나야. 난 셀린이야.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내 친구들한테 말 걸지 말아 줄래? 엄마는 너무 창피해."
그때 딸이 몇 살이었더라. 열세 살이었나? 확신에 찬 열세 살. 여자는 궁금했다. 무엇이 그렇게 창피했을까? 파마머리일까? 여자는 포장에 적힌 설명문을 읽지 않았고 약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 그래서 딸의 머리카락은 두피부터 꼬불꼬불 말린 상태였다. 아니면 벼룩시장에서 산, 허리에 휘장이라도 두른 것처럼 추켜올린 헐렁한 청바지 때문일까? 어쩌면 그저 그녀가 엄마라서, 모든 엄마는 창피하니까 그럴지도. 어쩌면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한 말일지도 몰랐다.
...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딸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오히려 그녀에게 더 친절했을 것이다. "넌 이해 못 할 거야. 하지만 언젠가, 너도 엄마가 되면 방금 한 말이 떠오를 거야.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은 스스로가 싫어지겠지. 넌 몰라. 아이를 낳는 게, 몸이 그렇게 터져 벌어지며 열리는 게 어떤 건지. 그러곤 그 생명을 닦아주고 씻기고 먹여야 해. 그 많은 울음과 트림과 똥을 처리하면서. 엄만 그걸 다 혼사서 했어! 넌 몰라!" 딸은 저 멀리 무언가 있기라도 한 듯 창밖을 응시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이 말 한마디만 할게. 꼭 기억해! 꼭 기억해야 해!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걸 깨닫지."
p.161-163
사실 그 조각은 곱게 접힌 채 내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그녀의 가랑이를 갖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여자의 가랑이가 있어야 할 부분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빙빙 돌렸다.
"무섭니?" 증조할머니가 재미있는 듯 웃으며 내게 물었다.
...
내게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증조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은 얼굴의 남자와 함께였다. 그는 사랑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회색 시트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 피만 보자면, 그건 정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었다.
p.179
사랑에 대해 거짓말하는 사람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차이는 없다.
그날 밤 메리는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났다. 그녀가 그곳에 살았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그녀로 인한 공허함은 점점 커질 터였다.
p.185
분홍색 페인트는 인기가 많아 가게에서 페인트를 섞어 직접 제조했기에 더 비쌌다. 아빠는 빨간색 페인트에 흰색을 소량 넣고 휘저었다. 벽에 막 발랐을 때는 분홍색으로 보였지만 마르고 나자 짙은 분홍으로 변했고 페인트가 잘 섞이지 않은 곳마다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페인트로는 곰팡이를 전부 가릴 수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짙은 분홍색 점들을 바라보고 혼자 웃곤 했다. 어쨌든 내게는 나만의 방이 있었고 아빠는 노력하고 있었다.
p.187
아빠는 동료들이 그를 부르는 말이 뭔지 내게 물었다. "티프. 그게 무슨 말이니?" 나는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계속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지금처럼 목표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아침에 눈을 뜨길 바랐다. 그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라고 답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곤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야. 그게 다야, 열심히 일하기." 이렇게 말하는 아빠의 눈을 보지 않으려 나는 눈을 돌리고 말았다.
p.193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티와 나는 연락이 끊겼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고심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거니까. 우리는 서로를 잃거나 서로를 알던 방식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p.194
그 애에게 달려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행복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물어보면 그 애도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질지도 몰랐다. 나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작업복과 작업용 신발 차림의 나를 보지 못했으면 했다. 가끔 사람들은 무언가 해명해야 할 듯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p.200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가 구했다는 일자리가 그런 게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p.204
어디가 머리고 꼬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너무 역겹다고 소리 지르며 땅에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창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많은 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고, 엄마 덕분에 이 일을 얻게 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p.205-206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백인 남자라도 하나 잡을까? 상상이나 되니. 아마 그들은 나한테서 '당신을 오래 사랑해' 같은 말이나 듣고 돼지처럼 내게 펌프질을 하고 싶어 할걸. 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고, 어떤 남자한테도 낮추고 싶지 않아. 차라리 혼자 살고 말지.
p.206
"나는 소작농의 딸이었지. 그게 어떤 건지 넌 아무것도 몰라. 진청색 치마와 흰색 셔츠를 입고 싶었어. 하지만 난 입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 그렇지만 너는 입을 수 있어. 넌 진청색 치마와 흰색 셔츠를 입고 학교에 다니는 여자애가 될 거야. 난 그렇게 못했지만, 내 아이는 그렇게 될 거야. 난 그 사실이 자랑스러워."
나는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꿈을 간직하길 바랐다.
p.208
시간이 날 때마다 아빠 생각을 했다. 두 살 때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기억했다. 우리는 그저 살고 싶었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수면 위로 머리만 내놓고 나와 엄마를 강 건너로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아빠를 바라보자 그의 머리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한번 더 물 위로 올라왔다. 입이 벌어진 채였다. 다시 가라앉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어떻게든 고무 타이어를 꼭 붙든 채 가까스로 강을 건넜다. 나중에 엄마는 내게 아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못 봤다고 말했다. 엄마가 아는 걸 원치 않았다. 아빠가 말레이시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어쩌면 기억을 잃고 새로운 가족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난 충분하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뱉은 소리는 소리조차 되지 못했다.
p.210
나는 누군가의 파트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달걀을 나 혼자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너 혼자 키우게 하지 않을 거야." 협동하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에 거부하지는 않았다. 나는 상관없었다. 그저 달걀일 뿐이었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
...
엄마는 그가 엘비스와 조금 닮았다며 몹시 예뻐했다. 나는 엄마와 제임스가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p.212-213
이곳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라오스에서 의사, 교사, 농장주였다. 엄마도 자기 땅을 가진 농장주였다. 밤중에 부드러운 흙 위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 없는 것들을, 땅의 똥을 찾는 인생을 살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렁이를 잡는 모습에서 그게 느껴졌다. 제임스는 아이 말고는 무언가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제임스가 지렁이를 잡는 모습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
나는 엄마를 살펴보았다.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제임스의 자리를 원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이 일을 사랑했고 제임스보다 훨씬 오랫동안 일했지만,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한편 제임스는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열네 살이었고 상사였다.
... 모든 게 터져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차를 타지 않았다.... "걔네는 서로 돕잖아." 엄마가 말했다. "잘됐지, 안 그래? 내가 데리고 간 망할 자식이 내 일을 가져가다니. 젠장. 망할 자식. 그래놓고 우리가 자기들 일을 뺏어간다고 비난하고. 아, 그거 아니? 그 자리는 내 것이 될 수도 있었어. 내 것! 젠장, 그 녀석이 그걸 채간 거야. 더구나 걔는 돈도 필요 없잖아. 그 돈이 걔한테 왜 필요하겠어? 부모가 다 사줄 텐데. 나한텐 먹여 살릴 자식이 있어. 왜 이렇게 화가 났느냐고? 땅의 똥 때문이야. 땅의 똥."
p.214
엄마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잡는 지렁이 수는 급락했다.
줄어든 마릿수를 메꾸기 위해 엄마는 더 오래 일했다. 한 때 그토록 자연스럽던 몸짓을 잊어갔다. 예전과 같은 능숙함과 애정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가 다가오는 걸 눈치챈 지렁이가 땅속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잡을 수 없었다. 엄마의 가슴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한때는 최고였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저조한 수확량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이 바뀐 건지 설명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그 숫자 때문에 그녀가 서툴고 게으르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알았다.
p.215
댄스파티가 열린 밤, 엄마는 내가 입을 분홍색 드레스를 내 침대에 펼쳐두었다. 제임스가 집에 올 때 그녀는 나가 있을 예정이었다. 카드놀이 모임에 가겠다고 했다. "네 인생에서 뭘 어떻게 하나는 말은 하지 않을게." 엄마가 말했다. "네가 그 애와 댄스파티에 가고 싶으면 가. 근데 걔가 집에 온다면, 난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넌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 거야.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면 친절해질 수가 없구나. 정말 못 하겠어. 하지만 네게는 인생의 기회가 남아 있잖니. 지렁이를 잡고 이 마을을 떠나. 친절하게 굴어."
p.216
나는 불을 전부 꺼두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
그가 초인종을 울렸다. 다시 한번 울렸다. 몇 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문을 쾅쾅 두드리더니 손잡이를 비틀어댔다.... 나는 문 반대편에 서서,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문구멍을 막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나의 눈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