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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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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Jan 16. 2023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올해 첫 책의 제목이자 내게 해주고 싶은 말.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는 내게 좌절과 해방을 동시에 주는 말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 때 얼마나 되뇌었던 말이던가.

내가 아는 상식과 다를 때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생각한 것조차 지켜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내가 갖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부수는 사람을 만날 때

좌절스럽지만 최소한의 상처를 받기 위해서 되뇌었던 말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


동시에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이 집단에 내가 속해있지 않는 것 같다고 여겨질 때마다

'우리는 다르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로써 내게 해방감과 안정감을 준다. 


올해를 이 책으로 시작한 것 자체가 내게는 2022년이 마무리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 8월에 이미 졸업했음에도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의 잔상들과,

여러 사람들을 차단함으로써 얻은 상실감과 해방감,

나의 노력에 대한 허무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의문과 분노는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것은 끝났다. 


 그리고 나는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남은 상처와 흉터와는 별개로 나아가야 하니깐 말이다. 

정말 놀랍게도 5개월이 지났는데

이제는 괜찮아졌냐고 물으면 안타깝게도 대답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아니다"이다.


뒤부아의 담담한 글은

폴이 왜 감옥에 갇히게 됐는지를 궁금해하면서도

그의 가정사와 부모님, 아내, 반려견의 죽음을 묵묵히 그러나 의문을 갖고 슬퍼하면서

그들을 떠올리고 고인들을 애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마도 누군가는 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파트의 수위였던 폴에게 갑질을 하던 세즈윅을 구타해서 감옥에 들어간 그였으니깐.

아, 

나는 폴이 정성껏 26년간 수질을 관리했던 그 입주민 수영장에 "드디어" 규칙에 따라 들어가

세즈윅을 바라보며 수영을 하던 그 장면을 너무나 좋아한다. 

복수,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보여주는 그 순간의 쾌감이란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었지. 

나는 정말 가능했으면 너를 찢어 죽였을 거야. 진짜 진심으로.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갑질을 당하면,

그래 세즈윅 같은 놈들은 너무나도 많기에 그럴 수 있다.

소위 그냥 똥을 밟은 거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주변인들이자 방관자들이 더 혐오스러워진다. 

어떤 이유였든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깐.

렉셀시오르의 충실한 관리자였던 폴에게 갑질을 하는 세즈윅을 보면서도

내버려 두었던 입주민들이 그를 손가락질할 수 있나.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스카겐으로 돌아간 것처럼

내게도 해방의 공간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p.36
  식탁에서 언성이 다소 높아지고 아버지가 즐겨 써먹는 가시 돋친 주문을 읊어댈 때면 -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당신이 완전한 신앙 안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오."-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도 했다. 아나 마들렌이 느꼈을 감정이 나중에는 이해가 갔다. 다정하면서도 은근히 멸시 어린 그 참을 수 없는 친절에 어머니는 한치 물러섬 없이 맞섰다.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가 있어?"


p.42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고통을 때렸다.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멸시를 때렸다. 부재하는 가족들을 때렸다. 시건방진 판사, 바쁜 치과의사, 딱 떨어지게 정의할 순 없지만 조만간 패트릭 호턴이 어떤 식으로든 "두쪽으로 찢어 죽일" 인간들을 때렸다. 그 2010년의 첫 밤에, 우리는 얼어붙은 강 바로 옆 얼어붙은 감옥의 감각 없는 배속에서 둥둥 울리는 북 비슷한 한 무리의 수감자들이었다. 


p.43

  람을 죽였다는 거인이 어린애 같은 일에 최선을 다해 매달리는 모습은 왠지 뭉클한 데가 있지만, 인간의 영혼의 엿같은 미궁에 대해 새삼 의문이 드는바, 되레 무섭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p.54

  하지만 오늘 저녁 당신 영화관 앞에 당신이 세워놓은 패널에 '예배당의 그늘에서 자유롭게 사유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말이 떡하니 적혀 있는 걸 보고 정말로 수치스러웠고 모욕감을 느꼈어, 나는 그거 이해 못 해. 이해할 수가 없어. 

...

  그 시대의 목사에게-... - 그건 너무 독한 약, 꿀꺽 삼킬 수 없는 쓰디쓴 약이었다. 


p.57

  "그래도 하루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CEGEP에 가서 몰래 숨어 있었어. 그런데 젠장, 수업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 거야. 아버지는 좆나 젊어 보였어. 게다가 모두에게 말을 걸고, 그 좆같은 제자들이랑 생글생글 웃고, 걔들을 자기 새끼 보듯 하면서 농담까지 하더라고. 아버지가 그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제일 좆같았지. ... 그날 나는 울었어. 진짜야. 형하고 누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그냥 그 이상한 집구석에서 계속 살았고, 집에서 나올 수 있게 되자마자 도망쳐 나왔지.... 어머니한테는 가끔 전화를 해. 우린 아버지 얘기를 절대 안 해. 죽은 사람인 셈 치는 거야."


p.59

  완벽한 빛의 우주, 아버지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그 반도에 말없이 처박힌 스카겐 화파의 문하생처럼.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없었기에 다시 그리는 일에 몰두했던 어린아이 시절부터 오직 그만이 알던 장소에 가 있는 것처럼. 


p.66

  오늘 아침, 심사관이 보낸 우편물을 받았다. 심리상담사의 진행하에 각자 자신의 인생사와 보르도 교도소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다른 참가자들 앞에서 말하는 워크숍에 참석해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존입니다. 폭력성이 점점 심해져서 여기까지 오게 됐고요, 지금까지 팔 개월 동안 주먹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일제히 외치는 거다. 잘했어요, 존."

...

  나를 형기 만료 전에 풀어주고 싶다면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두세 달 감형을 구걸하려고 그들의 손바닥에서 참회의 낟알을 쪼아 먹지는 않겠다. 


p.75

  돌연 그가 아주 오래 매달려 있었을 암벽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나는 이제 신앙이 없다. 단 하루도 믿음을 가지고 살 수가 없구나. 간간이 몇 시간조차도 믿음이라곤 없어. 이제 완성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안 남았다. 지난번 스카겐에 갔을 때 노목사님 하고 그런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단다. 그분이 그러시더구나 '이보게, 요하네스,  .... 신앙은 약한 거야. 신앙의 토대가 마술사의 재주보다 세배는 허망할걸. 좋은 마술사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지? 토끼와 모자가 있어야 해. 어떤 시대에는 내 손에 그게 다 쥐여 있었어. 그런데 이제 토끼도 없고, 모자도 없고, 마술도 없어.' 그래, 바로 그렇단다, 아들아.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았다.... 나는 먹고살려면 계속 무대에 올라가 만날 하던 대로 재주를 부려야 해. 배운 재주가 이것밖에 없는데 어쩌누. 아내도 없고, 토끼도 없고, 모자도 없구나."


p.79-80

  감금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난다. 푹 절인 나쁜 생각의 곰팡내, 아무 데나 뒹굴던 더러운 발상의 악취, 해묵은 후회의 시큼한 쉰내. 자유의 공기는 원칙적으로 절대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쓸어내리고 시간을 오래 들여 소화했다가 때가 오면 자유를 돌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속을 비우려고 밖으로 밀어내는 거대한 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p. 82-83

  집안 분위기는 매일매일 아내의 인내심과 남편의 애정을 조금씩 부식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차렸고 어머니는 여전히 늦게 들어왔다. 그들은 대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시간 차를 두고 밥을 먹었다. 

  1975년, 내가 스무 살이 된 해에 한 세계, 우리의 세계, 한센 가의 세계, 북구와 사람과 남구 사람이 만든 그 세계는 끝났다. 그들은 부부로 결합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뛰어넘고 각자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외국어를 배웠고,... , 신의 뜻을 설교하고 악마의 뜻을 영화로 전했으며, 피차 약속한 대로 매일 같이 문 앞에 쌓이는 모래를 쓸어내면서 뼈에 사무치도록 참고 견뎠으나, 그 끝은 헤어지고 떨어지고 갈라지고 나뉘고 부서지는 것이었다. 


p.88-89 

  나는 분명히 어머니처럼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이며 현대적인 관점을 취했지만 이 가정불화에서는 즉각적으로 아버지의 편에 섰다. 일종의 은밀한 덴마크적 연대 의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신앙을 잃고, 마술을 부리는 재주도 잊고, 모국어도 못 쓰고 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기다리며 막막하게 장대비만 바라보던 모습이 너무도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

  교단 위원회는 모두가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의 특수성을 이유로 들어 아버지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그 조치가 즉시 발효되게 했다. 

  아파트에서 나와 만났을 때 아버지는 말을 잃은 사람, 넋 나간 사람이었다. 


p.92

  어머니는 반도의 진짜 덴마크 여자처럼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당돌하고도 성난 눈으로 요하네스 한센의 푸른 눈을 쏘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한센은 작디작은 목사로 보였을 것이다. "이혼 서류는 이미 준비돼 있어. 현관 서랍장을 열어보면 찾을 수 있을 거야."


p.94

  나는 이 부재, 이 불편함을 자주 느끼곤 했다. 특히 망자들을 다 파헤쳐 꺼내고 난 후 나의 고독을 뼈저리게 실감할 때가 그랬다. 그 후로 나는 남부 유럽의 마지막 한센이었다. 


p.95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는 나와 살갑게 지내보려는 노력을 일절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기 인생을 살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란 듯이 무시했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아파트에서 오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고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처럼 보내버린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 단절은 결코 아물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캐나다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물 기회도 없었다. 


p.99

  셋퍼드 마인스 감리교회와 목사관은 1956년에 데이비드 스콧이라는 건설업자가 세웠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채굴 사업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는 미첼 구역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의 건축 차트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바깥쪽 주요 포장재: 석면. 벽: 석면. 지붕: 지붕용 석면 널판.' 하느님, 감사합니다. 

  도대체 신과 요하네스 한센은 그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가? 


p.105

  갇혀 있으면 날이 길어지고, 밤이 느슨해지며, 시가 늘어지면서 시간에 끈적끈적하고 약간 역한 질감이 생긴다. 저마다 뻑뻑한 진창 속에서 철벅대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자기혐오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한걸음 한걸음 악착같이 발을 빼내고 옮겨야 한다. 감옥은 우리를 산 채로 묻었다.... 행여 운 좋게 가석방이 된다 해도, 그들은 잠시 바깥공기를 마시러 나갔다가 여기, 세상에서 배척당한 자들의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성으로 부르고 농장의 가축처럼 취급하는 이곳으로.


p.109-110

  나는 어머니 얘기를 자주 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머니가 왜 그토록 일찍 오케스트라를 그만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다였다. 악보 밑 귀퉁이에 스위스인 동거인이나 덴마크인 전남편이나 프랑스인 아들에게 남기는 메모 한 줄 없었다. 아나는 1991년 5월 14일 예순한 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

  나는 궁금하다. 어머니가 아팠는지, 슬프고 지독히 외로웠는지,... 나를 부끄러워했는지, 내 아버지는 사랑했는지,... 내가 아기 때 밤에 와서 뽀뽀를 해줬는지,... 내가 어머니는 아주 예쁘고 아버지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으며 어머니가 선택한 영화도 전부 다 좋아했다는 걸 아는지, 우리 식구의 덴마크 여행을 기억하는지,...  

...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모든 일을 회상하면서 만약 내 어머니가 아버지였다면 최고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했던 아버지와 반대로, 어머니는 늘 뇌가 두 개 있는 사람 같았다. 


p.112

  몇 달 함께 살아보니 아버지가 여기서 제자리를 찾았음은 분명해 보였다. 마침내 그가 태어난 반도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세상에서 서로 호의를 주고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우주는 일상생활, 말썽 부리는 일 없는 포드 브롱코 66, 멀리 보이는 산, 집에서 지척에 있는 깊고 깊은 구덩이로 간단하게 요약되었다. 


p.124

  나는 그 콘도에서 이십육 년 동안 관리인, 수위, 잡부, 간호사, 교회신부, 정원사, 심리상담사, 전기기술자, 배관공, 주방설비업자, 화학자, 엔지니어였다. 요컨대 나는 그 작은 사원의 선한 수호자로서 거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거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p.125-6

  그렇게 조용히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입주자들은 자기네가 잘 알지도 못했던 그 사람이 렉셀시오르의 가장 비천한 종을 열성적으로 변호하고 나서자 더욱더 놀랐다. 

  늦은 저녁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리드 씨는 으레 술을 한잔하면서 잠시 얘기도 나눌 겸 나의 관사로 찾아오곤 했다.

...

  늘 그렇듯 리드 씨가 찾아와 줘서 좋았다. 그의 면회는 나를 바깥세상과 화해시켜 주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는 신뢰가 나를 달래고 진정시키고 위로한다. 


p.148-149
  그는 여신도들에게 잘 공감해 주고 그들을 늘 존중했다. 여신도들의 적성과 학업에 관심을 갖고 격려했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에게 도덕의 코르셋을 씌우는 법이 없었다. 요컨대 아버지는 이 나라의 가톨릭 성직자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
  그 당시 사제들은 방문판매원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정에 축복을 내렸다. 주로 그 집안의 어머니들을 만나서 출산에 힘쓰기를, 기진맥진한 육신은 잊기를, 중단도 휴식도 없이 신성한 육체관계에 매진하기를, 결실을 맺을 수만 있다면 육체관계를 만끽하기를 권고했다. 그래서 애가 열두 명쯤 있는 집이 흔했다. 결혼생활 십삼 년 동안 애를 겨우 일곱 명 밖에 낳지 않은 여자들은 고해소에서 질책을 당하고 불성실한 그리스도인 취급을 받다가 눈물범벅이 되어 나왔다. 
... 
  여성들의 집단 기억에는 아직도 이 모든 학대가 생생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감당하듯 출산을 거듭감당했고, 수탈당한 육신은 나이보다 빨리 쇠잔해 버렸다. 그러니 요하네스 한센 같은 목사는 사랑받지 않을 수 없었다. 

p.161
  비로 오래전에 신앙은 나를 떠나갔지만요. 비록 여러분이 나를 심판하고 단죄할 시간은 얼마든지 일을 겁니다. 그러니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177
  염소로 단장하고 - 나중에는 소금을 썼지만 - 입주자들이 춥지 않게 모재비헤엄을 칠 수 있게끔 거의 여섯 달 내내 데워둔 물 23만 리터를 변기물처럼 내려버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도시의 작은 바다, 그 순수한 조류를 하수구로 쫓아보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나의 외조부는 DS19 시트로엥을 택했다. 내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갈 날들을 촘촘한 시간 배정으로 지배해 버린 그 속세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p.179-180

  남이 보는 데서 변기에 앉아 급히 볼일을 보다니, 굴욕감에 피폐해진다. 이렇게 살라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이 세계의 폭력과 야만성을 점점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변의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변기로 달려가면서 패트릭에게 양해를 구한다. "어이, 얌전 빼지 마. 다 그러는 거야. 병에 걸린 걸 어떡해. 그러니까 복잡하게 살지 마. 마음 편이 다 비워 내. 마음대로 하고 난 신경 쓰지 마. 내 말 잘 들어둬, 난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 냄새도 못 맡아."

...

  때때로 호턴의 짐승 같은 야수성에서 고결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판사와 간수보다, 평생을 가르치는 일로 보냈으나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교수 아버지보다 그가 더 나은 데가 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도무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닐 때, 호턴은 섬광처럼 번쩍하고 인간미를 드러낸다. 


p.185

  전화로도 들었고 조금 전 공항에서도 그렇게 들었다. 나는 이 여인의 아들이다. 나는 건물을 돌본다. 나는 노인들을 돕고 이따금 병자들도 돕는다. 내가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아버지의 뺨이 그랬던 것처럼 싸늘한 어머니의 뺨을 손으로 쓸어본다. 


p.186

  경마팬 목사의 전처였던 내 어머니 아나 마르주리, 한 때 [딥 스로트] 홍보대사요, [돼지우리]의 선교사였던 초대 무신론자가 가스 소각로에 들어가기 전에 성직자에게 기름 부음을 청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다. 어머니는 메데이아만큼이나 불경하게, 세상의 모든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지옥으로 갔다. 


p.196-197

  이 업계의 계산표와 판사들의 계산표에서는 사교적이고 자주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고 스포츠를 즐기는 피해자가 - 이른바 '아웃도어지 피플(outdoorsy people)이  -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TV나 보는 고독남보다 값이 더 나가죠. 당신도 알겠지만 사실 아메리카는 죽은 사람이 건장하고 활동적이고 건강한 사람이어야 좋아하는 희한한 대륙이죠. 


p.198

  폴, 딱 그런 거예요. 나는 더러운 놈들 틈에서 더러운 방법을 더러운 일을 하죠. 만약 당신이 죽으면, 뭐, 이곳 캐나다는 사정이 조금 다르겠지만, 당신의 사후 몸값은 아마 변호사의 악덕, '어저스터'의 수완, 당신의 것이던 과거, 당신이 누리지 못할 미래, 당신의 피부색, 당신의 불운, 그리고 당신의 '만족스럽고 빈번한 성관계' 여부로 결정될 겁니다. 만족스럽고 빈번한 성관계예요, 폴, 살아생전에 그걸 절대로 빼먹으면 안 돼요."


 p.208

  우리의 희한한 결혼생활이 지속된 십일 년 동안 나는 숨 한번 들이마시는 순간조차 위노나 마파치를 사랑하지 않는 적이 었었다고 생각한다. 호숫가에서의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내 육신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녀를 내 안에 품었다. 그녀는 내 심장 속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위노나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렇다. 


p.209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좀 돼서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나의 내연녀는 바로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 알콘킨 인디언들은 계약이나 신성한 맹세 같은 거 없어. 함께 살고 서로를 위해 살면 다야. 같이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자, 이 경제적인 네 문장이 영국 여왕과 보통법을 그 습기 자욱한 섬나라로 반송해 버렸다. 


p.215

  언젠가 전부 무너져 내릴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개수대에 물이 샌다, 가스레인지 후드 필터를 갈아야 한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허겁지겁 올라가서 손을 봐줬고 내가 여기 있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 거대한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나에게 각별했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 내 딴에는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p.251-252

  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든다. 아들에게 훈훈한 새 얼굴을 선사하곤 했던 어느 어머니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게. "당신이 해냈네, 와, 씨팔, 진짜 해냈어. 와, 대박. 나한테는 암흑의 시대나 나비 뭐시기만큼 대단한 일이야. 머리 전체를 이발했는 데 한 번도 바닥에 드러눕지 않았다니. 내 인생에 이런 건 처음이야. 와, 쪽팔리지만 눈물이 나려고 해."


p.258

  그녀는 특별했다. 그녀는 한눈에 이 세상을 사랑하고, 숙고하고, 분석하고, 이해했다. 나는 함께 한 세월 내내 위노나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p.272

  헌병대원들은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뭔가가 내 속에서 빠져나와서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박차고 달아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 온 것, 아마도 나의 일부가 도망가서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오른손으로 그중 한 명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온 세상이 내 위로 무너지고 다리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의 발치에 주저앉았다.


p.288

  "경찰에게도 당신 고용주와의 갈등에 대해 전혀 해명을 하지 않았다면서요? 나에게 좀 더 이야기해보지 않겠습니까?

  자기 속에만 간직해 두는 편이 나은 것들이 있다. 혹은 아내, 아버지, 반려견 하고만 얘기하는 편이 나은 것들이. 그들은 스카겐의 모래 어딘가에 파묻힌 이야기를 처음부터 알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p.288-289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족도, 자유도, 나의 개도 이제 없었다. 나는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사나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누크가 틀림없이 내 옆구리에 얼굴을 간절히 들이밀고 싶었을 그 순간에 나는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p.293-295

  나는 이제 렉셀시오르의 수위가 아니었으므로 입주자의 손님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이용해, 물론 키어런의 동의를 구해서, 세즈윅이 보는 앞에서 수영장 라인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고, 선베드에서 일광욕도 좀 하고, 수영 가운 차림으로 다시 올라오고 싶었다. 정면돌파, 그로써 분노와 증오로 어지러웠던 그 모든 밤들에서 정신을 풀어주고 씻어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시간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금지되었던 시간. 왜 금지됐을까? 그냥 그랬기 때문에. 

... 

세즈윅도 아주 작아 보였다. 내 아버지의 말마따나 "쥐뿔만큼도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  가장자리로 테두리 돌을 짚고, 나갈 듯 말 듯 어정쩡하게, 엎드린 총잡이 자세로 샘나게, 세즈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물의 사체를 살펴보듯이. 그 소리 없는 관찰치료가 그에게는 수백 년 같았겠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의 무너진 교만과 생살이 벗겨진 어깨를 오롯이 음미할 시간을 나에게 선사했다. 

  나는 심장이 다시 평온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한 칸씩 올라 물 밖으로 나왔다. 풀밭에서 행복한 귀를 하고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는 나의 개 누크를 보았다.


p.298

  나는 괜찮았다. 나는 나의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장이 뛰고 그들이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곁에 있어 평안했다. 그들 모두, 셋 다 자기 방식대로 내 삶을 보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알기를 바랐다. 


p.304 (옮긴이의 말, 이세진)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법을 위반하는 선택과 행동을 했다면 거기에는 필경 법으로 담아낼 수 없는 윤리적 진실이 있다.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간의 추락은 단지 추락일 뿐이지만, 문학은 그 변곡점에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인간의 선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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