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말
#파쇄 #구병모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그동안, 책도 간간히 읽고
다른 곳의 독서 챌린지에 참여하면서
다 읽으면 여기 올려야지 하다가..
오늘이다.
이 책은 얇았고,
표지의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들이지마"가
비슷한 여러 말들 중에서 가자 와닿아서 일까.
집어들고 읽었다.
어릴 때 부터 좋아했던 구병모 작가이기에 선택한 것도 있고,
이 이야기는 <파과>의 킬러가 훈련받던 시기의 짧은 이야기이다.
<파과>는 작년 쯤인가 읽은 여성 노인 킬러의 이야기로,
여성 서사에 이미 익숙해졌던 내게는
재밌었지만 신선하진 않았었다.
<파쇄>의 작가의 말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새로운 여성서사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10년 전에 쓰여졌고 익숙한 이야기들이 최근에 많아졌기에),
충분히 좋았고 반가웠던 <파과>의 주인공이 '진정한' 여성 서사가 되느냔 질문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손톱을 칠한다는 것, 어린이를 구조하는 행위가 모성과 닮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것, 이성을 향해 발생하는 마음 등이 주요 결격 사유였습니다."
뭐랄까.
내가 배우고, 주장하고, 더 나아지는 방향이라고 믿는 페미니즘은
조금 더 다채롭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또, 다양한 젠더gender들에게 익숙하게 기대하는 것들이
개인과 사회의 한계로 적용되고, 그것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가두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
다시 또 정형화된 틀에 갇히고 싶은 게 아니다.
그래서 작가님의 말이 반가웠다.
나 역시 그런 점때문에 <파과>의 손톱이 좋았고,
수 많은 이제껏 다뤄지지 않았던 여성 서사로 대변되는 주변부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완벽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고와 유해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습니다.
넘치게 받은 사랑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완전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모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결격을 안은 쓰기를 계속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 구병모 <파과>
그리고
문장이 주는 묵직함이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 항상 되뇌이게 된다.
또
제대로 된 스승의 중요함을 느끼게 되고.
한동안 계속 생각이 날테고 앞으로도 때때로, 찾아서 읽을 그런 책이다.
좋다. 정말로.
p.10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p.27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마.
p.51
등 뒤에 앉은 그가 어깨를 노크한다.
-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옷 걷어주십시오.
한 손으로 매달린 새끼줄 위에 올라가 앉는 것보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옷을 걷는게 더 불가능한 과제다. 분노인지 가벼운 흥분인지 모를 것이 상처를 짓눌러온다.
- 안 합니다.
- 이유가 있는 거고, 나쁜 것도 무서운 것도 아니야. 병원 가면 의사 앞에서 청진 안 할 겁니까.
- 거의 가본 적 없습니다.
- 개새끼가 되기 싫어서 내가 가만히 있는데, 머리채 잡아다가 웃통 벗겨버리는 거 일도 아닌 건 알지.
냉혹한 내용에 그렇지 않은 어조로 미루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성싶지만 그녀는 공연히 옷자락의 배 부분을, 허공 위의 새끼줄보다도 더욱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끌어 쥔다. 반문하고 싶은 걸 꾹...... 누른다. 그럼 지금까지는 설마 ...... 개새끼가 아니었다고 하는 건가.
- 이런 식으로 사소한 데다 일일이 신경쓰면서 시간 끄는거, 지금만 봐줄 거고 다음에는 안 돼. 일하다 보면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거나 가진 거 입은 거 다 뺏기는 상황도 생기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수선피우면 거치적거려서 못 데리고 다녀.
거치적거린다. 이런 일로 힘을 뺄 만큼 한가롭지 않다. 피곤하게 만들 바에야 필요 없고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은, 어떤 선언이나 주문보다 강력하다.
걷어서 드러낸 등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다. 멘소래담 냄새가 코를 찌른다.
p.60
- 한 사나흘만 자빠지거나 구르는 건 피하자. 일단 이리로 와.
- 저는 괜찮은데요.
- 너는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 이런 건.
불쾌감과 묵직한 통증이, 튀어나오는 말의 신경 줄을 갉아낸다. 광목이, 해도 해도 너무 많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보란듯이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조가 담아준 광목은 넘치도록 많다.
- 못 쓰게 되어도 상관없고요.
실은 그 눈부시도록 깨끗한 광목 따위 한 장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그녕의 말소리는 발작적으로 뒤틀린다.
- 없어지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고요.
- 야 이 새끼야.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양이 이번에는 정말로 걷어찰 것 같아서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호흡을 거의 멈추다시피 하여 복압을 높인 상태를 유지하며, 길가에 핀 노랗고 하얀 씀바귀로 시선을 돌린다.
즉시 주먹이나 발로 내지를 기세였는데 그는 수초쯤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연다.
...
- 너 지금 제일 자신 있는 거 뭐야.
- 예?
이건 좀 뜬금없는 질문이다.
- 너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 그 ...... 힘 쓰는 거 말씀이신가요.
- 그렇지. 그걸 아는 놈이
그는 다섯 손가락을 펴서 그녀의 하복부를 감싸듯이 가리키곤 말을 어어간다.
- 여기 보존 잘해야 한다는 건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라는 게 아니야. 여기 망가져서 뽑아내면 힘을 못 쓴다고. 한동안은 보리차 주전자도 들기 힘들다고. 왠지는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어졌다고. 몸이.
주위에 그런 것까지 자연스레 알게 해줄만한 여자 어른은 없었으므로 몰랐을뿐더러 그 결과를 상상해본 적도 없음은 물론 이런 생각 자체를 무심코 처음 해본 거여서 그녀는 할 말을 잃는다.
p.68
- 물어볼 게 있는데요.
- 말씀하십시오.
- 지금 그거요. 왜 가끔 저한테 그런 식으로 합쇼하세요.
- 어, 이거 뭐 대단한 거 아닌데.
그것이 그저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노력에 가깝다는 사실쯤 그녀도 짐작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무게 추에 균형을 잡아주는. 그 한쪽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더없이 불가능을 닮았을 것이다.
- 이건 나를 위해서.
제가 아니고 당신을 위해서라니, 그녀는 의아하다.
- 지금 네가 어리고 환경상 어쩔 수 없이 내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내가 너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가끔. 너 굼벵이같이 하는 거 보고 내가 혹시 뚜껑이라도 열려서 치상이나 치사가 되어버리면 서로 곤란하잖아. 하산하면 너는 나와 같은 업자니까 굳이 그럴 일 없고.
그가 말하는 함부로의 기준은 그 정도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대부분 가혹하면서도 자주 조심스러웠음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