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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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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Jan 11. 2024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들어주는 것은 나의 시간을 나누어 함께 있어 주는 것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바로 취직이 될 지 확신할 수도 없고,

해온 게 아까워서  

다른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그리고,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기찻길에서 거의 다 읽은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내가 끌리는 유형의 것은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것에 질린 사람이니까. 


그보다는 일러스트의 고요함과 

추천글에 있는 정세랑 작가의 소개가 시선을 붙잡았다. 

그리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첫 책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정세랑 작가의 추천 글처럼 "지나친 자기애도, 격한 자기 혐오도 없이" 

또, 김혼비 에세이스트에 말처럼 "산책이 책이라면 은모든의 소설 같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한부모 가정의 아이인 해미를 과외하는 경진은, 

남편을 오랫동안 부양했고 돈에 예민하며 자식에게 우울함을 숨겼던 엄마의 둘째 딸이다. 

또, 엄마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그만큼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언니의 동생이기도 하다. 


생명과학을 전공했지만, 과외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어릴 때 예상했던 삶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이 정도로도 괜찮다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그리 떳떳하지만은 않은 더 정확히 말하면 부모가 자랑할 만한 직업은 아닌 것이다. 


경진의 어머니가 딸에게 전화할 때마다 

노후를 걱정하며 퍼붓는 질문과 반복되는 말들은 딸과 어머니의 관계를 소원하게 했다. 


그런 경진에게 해미는 자신과 달리,

엄마의 경제적 사정을 생각하며, 

과외비를 깍아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서로 돈독해보이는 과외 학생일 뿐이었다. 


어느 날에 할 말이 있는 모습을 그냥 넘겼고,

해미 어머니가 전화로 해미의 행방을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의 행동은 지쳐서 내 일로도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미의 가출? 실종? 소식에도 자신의 3일 휴가가 더 중요한 듯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불편했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 


그런데 그때부터 경진에게 여러 사람들이 말을 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미 그 전에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듣지 않았을 뿐. 

스치듯이 인생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가. 

잠깐 들린 안경집에서, 산책을 하다가, 기차 맞은 편에서, 세신사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순간을 기점으로 보지도, 듣지도 않던 것들에 눈길과 마음이 쓰이는 순간들이 온다. 

아마도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경험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사실, 해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을 빠르게 넘겼는데

아쉽게도 소설은 경진이 수업이 아닌 해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 지를 묻는 장면으로 끝났다. 


그냥 작가의 생각이, 해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왜 아빠를 언급한 것인지, 도데체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쩌면, 

주변도 그렇게 궁금해하며, 물어보라고 그렇게 끝낸 것이 아닐까 싶다. 


p.s 전주가 정말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전동 성당과 객사 부근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고향이거나, 가보신 분들은 더 반갑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p.17

  "어머니 가르마 때문이었어요."

  안경원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머니는 아들이 집 밖 출입을 포기한 채 한 계절을 지날 즈음부터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증을 앓게 됐다. 식탁 위의 약봉지를 보면서 죄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을 앞둔 어머니가 휑한 정수리를 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르마를 바꿔 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은 죽어서도 못 잊을 거라고 그는 설명했다. 물론 그날부로 곧장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문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p.54

  영락없이 투정 부리는 어린애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을 담고 있는 것은 성인 여성과 다름없는 실루엣이었다. 큰 키에 상반신이 선이 은근하게 드러나는 먹색 원피스를 걸친 실루엣. 누군가는 열다섯 살 서영의 아이 같은 동작에 시선을 두지 않고, 앳된 목소리를 듣지 않고 오직 실루엣으로만 대할지 모른다. 손을 뻗어 올지 모른다. 경진은 자신이 오늘 오후에 서영의 부모와 같은 입장이었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기 힘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족 나들이가 엉망이 되어도, 딸의 원망이 아무리 커도 우선은 정체 모를 남자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 혈안이 되었을 거라고.


p.58

  "아가, 그래도 아는 하나 있어야지."라는 말이 나왔다. 정말 아이를 어르는 듯한 어투였다.

"어머니, 그건 저희가 전부터 말씀드렸지만......." 하는 은주의 손등을 아버지가 지그시 누르며 말리더니 "그럼요, 사부인.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자식을 가지고 싶은 거는 본능이니까요. 그거는 뭐 앞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뀔 겁니다. 걱정 마세요."하고 웃었다. 은주 어머니가 자연의 순리가 그렇다고 말을 이었고, 예비 시아버지는 "요새는 애국이기도 하고요."라고 덧붙였다. 그러곤 시시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동원된 방청객들처럼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양가 어른들을 보며 은주는 숨이 막혔다. 그토록 지난한 설득의 과정을 거쳤건만 그간의 기억을 동시에 잃어버린 사람들 같았다. 궁극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의사는 전달했다고 생각하며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던 은주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배신감을 느꼈다.

 "어우 숨 막혀." 경진이 말했다. "어른들 그렇게 작정하고 시치미 뚝 떼면 진짜 사람 잡잖아."

 "숨 막힌다는 말이 딱이야. 열 받는 게 아니라 정말 숨이 턱 막히고 멍해지더라고. 나는 아이를 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낳아 키울 여건도 안 된다, 그 얘기를 도대체 앞으로 몇 번 더 해야 알아들어 줄지 짐작도 안 되더라."


p.127

  "진짜 쪽팔릴 만한 일은 안 놀리지. 그럼 장난이 장난이 아닌 게 되잖아."


p.132

  "고딩 때 내 성적에 감히 예능 PD 하고 싶다고 깝쳤던 거 알지. 나 진짜 뭐가 됐든 뽀대 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 

  "사람들이 들으면 우와, 할 만한 거? 그래, 그런 면이 있었지."

  "근데 내가 되고 싶은 건 다 학벌을 너무 보는 거야."

  "현수처럼 학교라도 다시 들어가기엔 네가 노는 걸 너무 좋아하잖아."

  "아이, 당연하지. 노는 게 제일 좋아. 뽀로로처럼."

  웅은 그렇게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에 원하는 직업상을 바꾸었다고 했다. 태그를 단다면 그전에는 #고스펙 #선망 직종이었던 것을 #트렌드를 주도하는 #성장가능성 #스타트업으로 바꾼 것이다.


p.156

  해미야.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 화면이 바뀔 때까지 경진은 속으로 몇 번이고 해미의 이름을 불렀다. 해미야, 세상이 이렇게 위험한데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니. 잠시 망설인 끝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들릴 뿐이었다.


p.159

  자기 때문에 반 전체가 혼날까 봐 마음을 졸인 탓에 미용사는 일단 안도감이 들더라고 했다. 그러다 교문을 나설 때쯤 눈물이 났다. 부끄러웠고, 실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공개적으로 책망을 당한 게 서러웠고, 그런 식으로 억울한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 터라 지긋지긋한 감정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여기가 내 자리가 맞을까. 이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텐데 학교에 꼭 다녀야 할까. 차라리 내일부터라도 엄마를 따라 일을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더라고 미용사는 고백했다.

"그때 얘들이 막 달려오더니 우리도 수학여행 안 갈래 하는 거에요. 경주는 나중에 학교 졸업하면 우리 셋이서 따로 가자면서. 그때 얘가 경주 별로 볼 것도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미용사는 경진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혔다.


p.161

  당시 그녀의 딸은 초과근무를 한 달에 100시간씩 시키는 회사에서 혹사당하다가 우울증에 디스크가 겹쳐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퇴사 후 딸이 한동안 집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통에 여행을 떠날 계제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살다 보니까 이렇게 옛날 일처럼 얘기하는 날이 또 오네. 내가 그때는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원형 탈모까지 왔는데, 안 그래도 벗겨진 남편이랑 부부가 쌍으로 민머리가 될 뻔했는데."

...

스카프를 맨 여자는 "그래그래, 잘 지나갔어. 머리숱도 돌아왔잖아. 여기서 네 정수리가 제일 빼곡해 얘."하면서 마지막 남은 도넛을 친구에게 건넸다.


p.165

  "멋있네. 요새 아가씨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대학까지 나오고 전공한 게 있더라고요. 그야 대학에 가는 내 또래 여자들도 있기는 했지. 우리 집에서는 꿈도 못 꿨어요. 언니나 나나. 막내는 나중에 지가 벌어서 간 거고. 언니랑 나랑 넷째가 십시일반 보태 줬지만, 오빠는 나몰라라 하더라고요. 받을 줄 만 알지 뭐. 말해 뭐 해."

...

  그녀가 아쉬운 것은 대학교 졸업장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은 꿈꿔 본 적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부모 품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부모가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그녀의 일을 진정으로 궁금해한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p.168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해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쌤, 내일 보충 30분만 늦게 시작해도 돼요?

  금요일 수업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도대체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순간 경진은 정수리에 열이 올라왔지만 어찌 됐든 해미가 무사하다는 데 감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p.170
 경진은 교재를 펼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음을 고쳐먹고 교재를 덮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한번 말해 봐. 천천히 다 들어 줄게. 오늘 시간도 한 시간 더 있잖아."
  해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경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라졌던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에 앞서 무엇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 이 아이를 괴롭히고 있을까. 경진은 섣불리 짐작하는 것을 멈추고 눈물이 맺힌 해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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