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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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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Oct 14. 2020

보건교사 안은영

에로가 더 낫다는 안은영과 함께라면 


#보건교사_안은영 #정세랑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었나?' '저 사람은 나한테 왜 저러지?' 

지치고 지쳐서 쉬고 싶었다. 

젤리처럼 흐물흐물한 내게 넷플릭스의 광고는 너무 매력적인 것이었고,

안은영의 욕을 듣고자 공개된 그 날 정주행을 끝냈다.

너무 아쉬웠다. 이렇게 짧다니.

나는 안은영이 조금 더 필요했고, 그녀의 세계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도서관 대출 예약을 해놓고, 그 날만을 기다리며 설렜었다.

그리고 조금씩 아껴보다가 오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을 다 읽었다. 

아, 정세랑 작가님. 저는 시리즈를 강력하게 원합니다. 

조금 더 빨리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장르를 바꿔버린 안은영과 귀여운 홍인표 그리고

절제되고 정교하게 페미니즘을 녹이고, 사회의 부조리를 짚어낸 작가님에게 반했다.

앞으로도 '쾌감'을 원하는 순간마다 들여다볼 것이다.

그냥 사야겠어.




"경쟁에 적합해 보이지 않은 동물이라 귀여운 것이지만 그래도 은영은 혜현을 자주 깨웠다."

- p.60


"홍 샘 저 이거 못하겠어요. 차라리 총칼 들고 싸우는 게 적성에 맞아요. 어디가 어디랑 꼬이는지 어디 사이로 어디를 넣으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는 파이터예요. 이런 거 못해요."

- p.70


"굉장한 노 브라였다. 뉴질랜드에선 자연스러운지 몰라도 일단 교사인 인표의 눈길도 자꾸 쏠리는데 사춘기 애들은 이 서구적인 건강함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보건 선생이 불을 뿜으며 브래지어가 유방암을 유발한다느니, 인생을 살며 한 가지 운동에만 투신하라고 한다면 노브라 운동일 것이라느니, 이제부터 자기라도 실천하겠다느니 펄펄 뛰었지만 그런다 한들 임팩트가 같으리오 싶었던 게 인표의 속생각이었다."

- p.94


"할아버지는 놀아 본 놈이 큰 사고는 안 친다고 하셨다."

- p.95


"은영이 보기엔 좋은 충고였다. 사람을 쉽게 믿고 사람에게 후한 녀석이라 최대한 다양하게 만나서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 p.107-8


"왜 인류는 더 우아하지 못할까. 교양 있게 자제하지 못할까. 내가 이렇게 맛있는 참치를 사 주는데 왜!"

- p.109


"차라리 집에 가서 『사기 열전』을 정독하며 인물 보는 눈을 기르는 게 낫겠다. 가볍게 마시고 아름다운 원전을 읽는 일은 얼마나 운치 있는지,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 110 


"기도 확보하는 법,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 흉골 압박 심마사지를 가르쳤는데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만이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멀미를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면 나아지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 p.112


"친절. 인표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교양, 매너, 우아 등과 함께 인표에 효과가 있는 말이었다.... 전통, 그게 결정타였다. 평소 메켄지가 구사하는 단어들은 그다지 인표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날따라 표적 가까이 꽂혔다."

- p.115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 p.117


"그때 저 운동장 끝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보건 선생이 보였다. 또 스타킹 발로 운동장을 뛰다니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될 텐데,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은영 씨, 나 어떻게 좀, 미친놈이 붙었어, 은영 씨, 당황하다 보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p.122


"어떤 나이에는 정말로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

- p.125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 p. 138


"하루에 두 번째로 보건실에서 쫓겨난 인표는 복도에 서서 생각했다. 역시 이용당한 것 같아."

- p. 168


"어쩌다가, 너무 젊잖아, 왜 그랬어. 여러 가지 말들이 혀끝까지 밀려왔지만 이런 경우를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은영은 그래서 가볍게 초대했다.

잠시 앉았다 갈래?"

- p.178


"학교에서 두 사람을 가장 개의치 않는 무리였다. 하긴 그렇게 폭 넓고 놀라운 이야기들에 푹 젖어 사는 아이들이었으니, 쉽게 편견에 사로 잡힐 리 없었다."

- p.183


"아아아, 둘 다 닥쳐, 하고 말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184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 p.187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 p.189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 p. 193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인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 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 p.210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거절도 할 줄 아셔야 해요. 과도한 업무도 번거로운 마음도 거절할 줄 모르면 제가 아무리 털어 봤자 또 쌓일 거예요. 노, 하고 단호하게 속으로라도 해 보세요."

- p.213


"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 얼떨떨한 상태에서 오래된 옴잡이의 마음이 점점 어려졌다....

너랑은 이제 상관없어. 옴잡이가 아니잖아. 설사 옴이 창궐한다고 해도 네 책임이 아니야."

- p.216


"그리고 대흥은 조금 덜 온건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었고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대흥은 변했다. 학생들은 대흥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대흥의 기대보다 자주 하곤 했다. 이를테면 '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선거에서 뽑히나요? 왜 좋은 방향으로 일어났던 변화들이 무산되나요? 왜 역사는 역류 없이 흐르지 못하나요?' 그런 질문들이었다. 예전 같으면 얼버무리거나 피했을 텐데 대흥은 최대한 덜 민감한 방식으로 설명을 해 주려고 애썼다.... 항의 전화를 감수하더라도 해 줘야 할 설명이었다고 선배들과 독한 술과 꼬치구이를 사먹으며 항변하기도 했다.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 p232-3


"두 사람은 몇 년 새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길게 말하지 않아도 쉽게 좋은 호흡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나 연인은 아니었다. 매주 손을 잡고 걸어도 연인은 아니었다. 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 여기엔 잠시 있는 거예요,라고 항상 내비치는 여자를 향해 감정적인 경계선을 넘기에는 인표가 너무 현명했다."

- p.238


"은영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모진 의도가 없었다 해도, 머물지 않겠다는 그 표정만으로 지난 몇 년간 인표는 신경통 비슷한 것을 앓아야 했다.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관계라면 놓아야 하는 관계겠지. 그런 말 그대로 기운 뺏기는 관계는."

- p.242


"은영은 자기 몸이 꼭 계획 없이 막 지어진 가건물이나 창고 같았다. 제 소유가 아닌 것들이 가끔 가득 들어찰 때도 있었으나 이내 빠져나가고 비바람에 시달리며 녹슬어 간신히, 안간히, 겨우겨우 서 있는 그런 슬레이트 건물 말이다."

- p.246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247


"등 뒤에서 악의를 가지고 흉내 내는 일은 정말로 한 번도 없었다. 모욕감이나 분노보다도 충격에 빠져 인표는 황망히 서 있었다. 

 그 주에 서로 사귀던 여학생 커플이 집단 구타를 당했다....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건 나중에,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나이가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인표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해치려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가득 만날 테니까 지금은 손잡고 다니게 두고 싶었다....  

 남녀 커플이든 여여 커플이든 쉬는 시간에 에어컨 뒤에 기어 들어가 서로 더듬지만 않으면 터치하지 않는다는 이 간명한 아우트라인을 왜 모두가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표는 교양이 풍부했으므로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늘 있었던 동성애가 '교정' 대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닌가. 늘 있었던 것, 앞으로도 있을 것.

 그런데 이 커플은 구타를 당했다.... 인표는 이 갑작스러운 증오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린 아이들을 다그쳤는데 그 나이 특유의 방어적인 얼굴로 한 아이가 말했다.

"더러워서요. 더러워서 때렸어요."

더러운 게 뭔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게 교사로서 참담했다."

- p.248-9

 

"폭력이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맥상통하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애초에 처음 한두 번을 용인해 주지 말았어야, 유야무야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을 문제였다."

- p.250


"어휴, 씨발, 내가 또 저 꼴은 못 보지. 어디 학교를 이따위로 이용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의 발밑에 저런 걸, 저 검고 비틀린 걸 심다니."

- p.261


"그러니까 여자를 만나도 좀!"

... 그래도 인표는 은영이 전하고자 한 바를 용케 알아듣고 항변했다.

"니가 안 만나 줬잖아!"

- p.262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65


"그만두지 말아요. 다른 데 가지 말아요."

"안 그래도 몇 년 더 있으려고요. 이 학교는 잠잠하다 싶으면 더 위험한 게 꼬여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랑 있어요"

...

"엄청 차근차근 추근거리네."

은영이 궁시렁거렸다.

"좋아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꽃무늬만 입는다 해도."

하하하, 이번엔 은영도 웃었다. 인표는 정말 그러고 나타날까 봐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같이 웃었다."

- p.272



이렇게나 구구절절 마음에 들다니

찍어내는 듯한 여성의 모습에 지친 나에게 

너무 완벽한 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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