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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May 13. 2024

지구 끝의 온실

생의 한 순간의 기억이 평생을 견디게 할 수 있다.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오랜만에 읽었던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이다.

『방금 떠나온 세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과는 매우 다르다. 


전작들에서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세계가 너무 좋았다. 

'SF적인 소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시간의 관념이 다르구나', '이과는 이렇게 풀어가는구나' 같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들었고,

작가님의 언어와 세계에 빠졌었다. 


처음으로 작가님의 장편 소설을 읽어서일까. 

그냥 이 이야기가 힘이 있어서일까. 


과학 실험으로 생긴 '더스트'로 인해서 지구의 멸망이 가까이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돔 외부에서는 호흡하지 못하고 돔 내부에서 살게 되면서 적은 자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이후, 더스트를 없앨 수 있는 것이 다시 발명되었고 이제는 지구가 회복 중인 상태인 포스트-디스토피아라는 배경에서 '모스바나(식물)'에 대한 랩걸(lab girl) 아영의 호기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사실

인류의 멸종 위기와, 

디스토피아적 세계(더스트 시대)에서 혼란을 겪은 생존자들이 정부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

잔인한 존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와중에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공동체들이나 변이종이 생기는 것 등은 SF에서 굉장히 흔한 소재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초반에는 '더스트를 버티게 하는 모스바 나가 대체 무엇인지? 아영의 기억 속 희수 씨는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며 빠져들고,

중반부터는 '프림 빌리지가 유지될 수 있을지? 온실의 레이첼은 누구인지? 지수 씨가 희수 씨인지?'의 답을 찾고자 책을 놓지 못한다. 

끝에서는 해월에 모스바 나를 번식시켜 지수 씨를 찾고자 한 레이첼과 이제는 만날 수 없고 기록으로만 남은 지수 씨를 보면서 굉장히 생각이 많아진다. 레이첼이 죽음을 택하기도 했고.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관계가 주는 감동이 컸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거의 몸이 기계로 대체된 식물학자인 '레이첼'과 기계 정비사인 '지수 씨'의 짧다면 짧은 '프림 빌리지'의 생활모습과 그들의 관계와 사랑을 곱씹게 된다. 


레이첼이 기계 몸을 가졌기에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지수는 만족했고, 레이첼은 수많은 정비공이 아닌 지수가 곁에 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 결과, 레이첼은 더스트를 중화시키는 모스바 나가 프림 빌리지 근처에서만 서식할 수 있도록 품종을 개량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지수가 옆에 있기를 바랐으니까. 


지수는 식물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무심한 레이첼에게 호의를 얻고 싶었고, 뇌를 고쳐줄 때 주변인에게 호의를 갖게 하는 스위치를 켰다. 그리고 이후에 이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지수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으나, 둘 모두 스위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감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이들은 서로가 각자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소유욕과, 

진심이 아닌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한 

죄책감과 배신감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감정에 정의를 내리고자 돌아갔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들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아찔한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까이 있음에도 말을 하지 않아서

말을 하지 못해서

우리가 놓치고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길까.

얼마나 안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까.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는 데, 

이 문장들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p.361

  몇 달을 붙잡고 있었던 논문이었고, 나오미의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부터 예상하던 내용이었는데도 직접 눈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는 발생할 수 없는 식물 분포에 대한 연구 결과인 동시에, 어떤 마을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p.378

  문득 아영은 레이철의 눈빛이 어릴 적 정원에서 보았던 지수의 눈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그리움이 섞인, 하지만 고통이라고만은 단언할 수 없던 어떤 복잡한 감정이 그 시선 속에 있었다.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p.389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아영을 보면서 사실 마음이 안 좋았었다. 

어렸을 때 나는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맴돌았달까. ㅎ


지금은 심리 통계를 살리고, 연구도 좋아하니까

웹개발이 아닌 데이터 분석 쪽으로 분야를 틀고, 

데이터 사이언티스로의 전직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뭐랄까.

하고 싶은 게 없다. 

이 분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분야에 무지해서 그런 거겠지.


심리학을 할 때는 언제나 호기심이 넘쳤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알았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갖는 혼란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어로 정제된 용어가 있다는 것은, 

또, 누군가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주기도 하니까. 

그리고, 내 다음의 연구자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 이야기가 그러하다. 

단순히 한 시대의 특출 난 몇 명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다. 

레이첼이라는 사이보그가 만들어낸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식물을 퍼트리려고 노력한 자들이 있었다. 프림 빌리지의 좋았던 기억을 위해서이든, 세상을 구하려는 사명감이든, 삶의 이유이든 어떤 것이든 사람과 시대로 전해진 마음들이 만든 것이다. 


말레이시아도 이 책의 배경 중의 한 곳인데,

나에게 말레이시아는 친구들이 있는 곳이자, 대학원을 가겠다고 결심한 후에 잘 이겨내 보자고 문신을 한 곳이며, 음식이 맛있으니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커리어를 바꾼다고 내가 지나왔던 삶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기에 곳곳에서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서 끝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 오전에 

작년 이 맘 때에 임상심리사 시험을 봤던 곳에서 

짧다면 짧은 1년 사이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을 봤다. 

아직도 연습지를 받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이과는 계산을 하나보다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마침 지난주에 면담하고 보고서 작성하는 일을 오랜만에 하게 되어서 그런지 싱숭생숭하달까.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오랜 기간 갈고닦았는데 정말 버리는 게 맞는 가 싶으면서도,

글쎄. 잘 모르겠다. 

완전한 후회도, 그리움도, 고통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될 걸 그렇게 고생했나 싶으면서도,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싶고.

집착하지 않는 나의 상태가 좋으면서도,

길을 잃은 것 같아 불안하고 아쉽다. 


그래서 결국 만나지 못한 지수와 레이첼을 보면서 많이 아쉬웠다.

화해하고 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실상에 가까워서일까. 

0.001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틀어진 각도도 시간이 지나면 큰 궤적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각도가 틀어지게 둘 정도로 미숙했던 점은 아쉽지만 복잡하달까. 


또, 나는..... 흠

나는 아마도 아직은 세상의 재건에 관심이 없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서 그냥 흘러가게 두기로 했다. 

이미 해온 것으로 내가 한 것은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아마라가 한 말처럼 버려진 우리가 굳이. 

돕고 싶고, 도우려는 마음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전공을 선택했던 이유가 있는지라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만났던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참.. 대체 누가 누굴 돕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조금씩 해나가는 게 작가님이 말하고자 했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ps. 흡입력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 추천한다. 

또, 지구 끝의 온실이.. 현실이 되지 않게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 

좋다. 






p.63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p.77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 것들이지."


p.82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나,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들, 바다와 호수의 조류, 축축한 곳마다 균사를 뻗치는 균류.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 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 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p.83

  행성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고, 생물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따라잡았다. 아영은 그 과감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새 식물 표본들을 관찰하는 날이면 아영은 이 식물들이 얼마나 긴 역사를,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지 상상했다. 


p.108

  "아마라는 진실을 알리고 싶어 했고, 루단은 우리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유일한 친구였지요. 정작 아마라는 지난 몇 년간 입장을 바꾸어서, 자신이 잘못 기억하는 것 같다고, 프림 빌리지 같은 건 없었다고 말하고 있죠. 저도 이제 아마라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과거를 반복해서 말해봐야 비참해질 뿐이니까요."


p.165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p.193

  지수 씨는 레이첼을 볼 때면, 무언가에 홀린 것 같으면서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자주 지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사라지고 싶은 것처럼.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수 씨가, 나와 레이첼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p.215

  다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p.223

  "자신이 원한다면, 레이첼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겠지. 정보도 있고 능력도 있는 데다, 운도 따라줬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은 그걸 원하지 않아."


p.226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p.254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 그 사람의 생사를 알게 되면 꼭 바로 알려주세요.'


p.257

  하지만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p.260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목적지로 가는 길도 여러 경로가 있다. 그렇지만 굳이 온유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아영은 이 문제를 푸는 일이 과학자로서의 호기심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게 한, 신비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그리움. 지금 시점에서 이희수를 찾는 까닭은 그것이 최적의 해결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영의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었다. 


p.293

  "인류의 구원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저지른 짓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죠. 안 그래요?"


p.296

  그리고 거래를 제안한 데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면, 그건 레이첼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혼자 폐쇄된 온실로 도망쳐 식물들을 들여다보다가, 수년간 잠들기로 결심한 사이보그. 지수는 그의 내면을 열어보고 싶었다. 식물들 앞에서 변하는 그 표정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잘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의 구조가 궁금한 것처럼, 지수도 레이첼에게 그런 종류의 호기심을 느꼈다. 


p.304

  지수는 그런 레이첼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사고와 내면과 감정이 궁금했다. 그가 설령 지수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럼에도 살아 있는 한 지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p.332 

  무언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발단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제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감정적 불안정 현상이 시작되었을 때. 패턴 안정화 스위치를 상의 없이 올렸을 때. 기계 뇌에 유기체 잔여물을 실수로 남겨두었을 때.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애초부터 자신이 무엇을 바랐었는지 지수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이따금 레이첼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시선, 그게 좋았던가?

하지만 이렇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p.354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 빌리지 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p.361

  몇 달을 붙잡고 있었던 논문이었고, 나오미의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부터 예상하던 내용이었는데도 직접 눈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는 발생할 수 없는 식물 분포에 대한 연구 결과인 동시에, 어떤 마을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p.378

  문득 아영은 레이첼의 눈빛이 어릴 적 정원에서 보았던 지수의 눈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그리움이 섞인, 하지만 고통이라고만은 단언할 수 없던 어떤 복잡한 감정이 그 시선 속에 있었다.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p.389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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