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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숲 Oct 02. 2020

토란국 한 그릇에 울고 웃은 장터 날


장터 참여자들은 부스를 얻어 직접 수확한 곡식이나 음식, 수공예품 등을 가져다가 좌판을 연다. 각자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정갈하게 라벨을 붙여 판매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저 위의 광고물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저녁 먹고 내일 유바 후지 마츠리에 가지고 나갈 와플 포장 좀 도와주렴.’

단풍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11월의 어느 날, 아케미 씨가 와플을 구우며 말했다. 유바 후지 마츠리는 유바를 만들어 파는 <유바 후지>라는 가게가 매 해 11월 말 주최하는 지역 장터다. 아케미 아주머니는 매년 빵을 판매하는 것으로 꾸준히 참가해 왔는데, 올해에는 와플과 토란국도 함께 판매하기로 했다. 


조금 더 맑은 장국 스타일로 먹는 건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토란국을 먹는다. 그리고 주로 아키타, 후쿠시마, 이와테와 같은 추운 도호쿠(동북) 지방에서 먹는 음식이라 시가현과 같은 간사이 지방이나 남쪽 지역에서는 낯선 음식이라고 한다. 


이런 지역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확실히 일본이 한국에 비해 크고 긴 나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감하기 힘들지만 일본은 남한에 비해 4배나 크다) 아무튼 간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토란국이지만 아케미 아주머니는 어린 시절을 이와테현에서 보낸 부모님의 영향으로 토란국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토란국을 팔기로 한 유바 후지 마츠리 날, 아침 일찍부터 도와주러 와준 카토리 군 덕에 뚝딱뚝딱 순식간에 부스가 완성되었다. 아케미 아주머니는 곧바로 곤로에 커다란 솥을 얹은 뒤 토란과 미리 잘라놓은 재료들을 넣고 토란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 냄새 좋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생각보다 일찍 손님이 많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식 오픈은 오전 11시지만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이미 대부분의 부스가 준비되어버린 데다 손님들도 입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날 갑자기 날씨도 쌀쌀해져 버렸다. 덕분에 토란국 부스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고, 이 앞에서 호~호~ 불며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손님이 찾아왔다. 







결국 11시에는 솥이 텅 비어버려 오픈하자마자 손님들에게 ‘아이고, 죄송해요~ 다 팔렸네요’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 빵과 와플도 순식간에 다 팔려 12시에 모든 상품이 완판! 되어버렸다.  그럼 '오늘 다 팔아서 문 닫고 집에 갑니다~’하고 집에 가서 푹 쉬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 


슬프게도 우리는 집에 갈 수 없었다. 부스가 가장 안쪽에 있어 앞 부스의 사람들이 모두 나가지 않으면 차를 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빈 냄비와 빵 상자 앞에서 '다 팔렸습니다~'를 반복하며 폐장 시간까지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부르스타를 켜고 성냥팔이 소녀 놀이를 하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아케미 아주머니의 성냥팔이 소녀 놀이


그러던 중, “토란국 더 없나요? 아쉬워라…”

빈 토란국 솥을 보며 유난히 아쉬워한 손님이 있었다. 황토색 개량한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을 보고는 반가워 말을 더 붙여봤다. 


"우와, 개량한복을 입으셨네요?"

"네, 편해서 일상복으로 자주 입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도호쿠 대지진 원전사고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온 피난민이었다. 일가친척이나 이웃들은 대부분 치바에 정착했지만 자신은 시가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자 홀로 이사 온 참이라고 했다. 후쿠시마는 토란국을 먹는 지역이라고 한다. 내가 일본에서 그녀의 한복을 보고 반가웠던 것처럼 그녀도 낯선 곳에서 고향 음식을 보고 반갑지 않았을까. 완판이라고 좋아했는데, 빈 냄비가 야속해진 날이었다. 


그래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아케미 아주머니 소개 리플릿을 건네며 말했다.

"다음에 또 토란국 만드는 날이 있으면 놀러 오세요-" 


시가에서도 맛있는 토란국을 드시길 바라며. 



뱀발 1>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을에 수확해 주로 따끈한 국으로 만들어 먹는 토란은 열대식물인 타로의 변종이다. 동남아에서는 타로를 갈아 얼음과 함께 시원한 밀크티를 만들어 마신다고 한다.


뱀발 2> 한국에서는 생소한 ‘유바’라는 음식은 두유를 끓일 때 표면에 뜨는 얇은 막을 막대로 건져다가 굳혀서 만드는 음식으로, 맛은 두부와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정진 요리(사찰음식)의 재료로 많이 쓰이는데, 교토와 오오츠시 중간에 위치한 엔랴쿠지라는 절에서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주변으로 퍼져나간 것이 시초라고 한다. <유바 후지>는 이 오오츠시에서 대를 이어 장사를 해 온 가게로, 유바 후지 마츠리 라는 장도 꽤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뱀발 3> 이날 저녁도 토란국이 나올 줄 알았는데, 다들 수고했다며 아주머니가 티본스테이크와 명란 스파게티를 만들어주셨다. 피곤하셨을 텐데 순식간에 뚝딱 만드시는 걸 보고 역시 차원이 다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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