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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Nov 17. 2019

06. 숙제 : 촌스러워질 것


매일 어김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다. 얼굴을 모르지만 엉거주춤 반쯤 일어나 인사를 한다. 

그럼 상대방은 낯선 존재인 우리를 반가워하시며 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우리의 소개를 한다. 환영받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꽤 정겹다. 


_


가끔 사무실에 들르는 상훈 선생님께서 아침부터 우리의 안부를 물어보신다. 교사를 정년퇴임하시고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계시는 선생님은 탁구를 치러 주 중에 두 번 학교에 오시는데, 그때마다 사무실에 들러 우리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시거나, 혹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가신다. 


첫 만남에서 우리가 지역에서 6개월 동안 살게 되었다고 소개를 하니, 숙제를 내주셨다. 

앗,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촌스러워지기. 

‘촌’스러워지기. 

쉽지 않다. 먼저 촌을 알아야 한다.


_


또 다른 날은 우리가 뭘 좀 해먹고 사는지 궁금해하셔서, 어제저녁 메뉴를 말씀드렸다. 가지 무침과 버섯 감자볶음. 


가지도 먹을 줄 아냐고 되물으시길래, 어려서는 별로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 맛을 알면 어른이 된 거'라 말하고 웃었다. 가지는 어른의 맛. 그리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선생님께서 품에 한가득 깻잎을 안고 들어오셨다. 그다음엔 가지를 한 아름. 모두 유기농으로 직접 기른 식재료들이다. 그 귀한 재료를 우리가 제대로 못 해먹을까, 손수 정리하는 것까지 시범을 보이신 다음에 다시 또 홀홀히 떠나셨다.





향긋하게, 사무실에 깻잎 향이 퍼졌다. 





또 어떤 날은 사무실에 들러 '여유를 가지고 살자'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유를 가진다는 게 어떤 걸까요?" 


정말 그리 살고 싶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 갑자기 막연한 느낌이 들어 다시 여쭤봤다. 여기서는 궁금한 게 있으면 되도록 미루지 않고 물어보려 애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여유로운 걸까? 속도가 느린 것이 여유로운 걸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여유를 갖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들러 툭툭 화두를 던져놓고 가시는 저분이 말하는 '여유'는 무얼까 궁금했다. 


잠깐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해주신다. 


"밥을 하나 해 먹어도 후딱, 빨리빨리 해치우듯 하는 사람이 있어. 그거 해놓고 나서 뭐 별로 특별히 할 일도 없으면서. 그런데 하나하나 직접 해봐야 기억에 남거든? 뭘 하든 해치우듯 해버리면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성공이 뭐야, 나이 들수록 기억할 순간이 많은 게 성공한 거야. 기억할 순간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게 여유야." 


내가 던진 우문에 정답이 있을까. 그저 각자의 답이 있을 뿐이다. 

상훈 선생님의 여유는 '불편을 자처해서 기억할 순간들을 많이 만드는 것'에서 온다. 나에게 여유는 무엇일까.


여유의 국어사전 뜻을 살펴봤다.



여유

1.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2.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생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또 숙제가 생겼다. 나의 여유의 정의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내게서 여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자. 

내가 여유 있게 살고 싶은 건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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