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봉제로 들어오는 안정적인 급여, 주 5일 근무, 회식 없는 문화 그 모든 것이 완벽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으로 뿌듯했다. 직장에 애착을 가졌고 끓어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 치료에 쏟아붓는 병아리 신입이었다. 긴장이 풀리는 주말이면 응급실을 밥 먹듯이 갔지만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즐거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큰 부분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일했다. 1)마슬로우의 욕구단계처럼 소속감이 채워지자 나는 내 역량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치료 준비를 마치고 아동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아동이 즐거워할 모습을 생각하자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데리러 가던 그 길, 상사의 말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게 어그러졌다.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고 좌절을 맛보았다.
나는 내 역량이 돋보이는 장소에서 일하고 싶었고 집으로 돌아와서 분이 가시지 않는 상태로 오빠에게 이야기했다.
"나 퇴사하고 싶어."
그 당시 예비 남편이었던 오빠는 내 하소연을 듣고 내게 물었다.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한 거지?"
사실 우리는 아파트 전세 계약을 이미 완료한 상태였다. 오빠는 내가 한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직장 근처에 자리를 잡자고 배려해주었다. 내 말 한마디로 오빠가 해 준 배려가 물거품이 되었다.
"응 그런데 나 더 못 다니겠어. 미안해."
오빠는 내게 이야기했다.
"나도 마음을 비울게. 하루만 시간을 줄래?"
그리고 다음 날은 내 생일이었고 오빠는 선물과 편지를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이 세상에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서로를 잘 챙겨주자. 나를 의지할 지팡이가 녹이 슬게 할 수가 없으니 약 먹는 것도 잘 챙겨서 우리가 함께 병원을 한 걸음 한 걸음 멀리하고 싶구나. 내가 평화가 하는 일에 전문지식은 없지만 적어도 나 때문에, 돈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주인공이 더 빛날 수 있는 예쁜 이야기를 그려보자."
나는 눈물이 났고 생일날 퇴사를 결심할 수 있었다. 일주일 고민하고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오빠의 응원으로 내 선택에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인수인계를 미리 받았고 선생님들의 조언을 새겨듣는데 유독 한 문장이 귀에 꽂혔다.
"익숙해지면 두 군데를 보통 병행하면서 일하니까 차가 진짜 필요할 거예요"
나는 당장 차를 사야 했고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오빠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미리 차를 사서 연습해야 할 것 같아. 차가 있어야 좀 거리가 있는 곳이라도 이력서를 넣어볼 수 있어."
오빠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답했다.
"한 곳 일하고 나서 좀 적응된 후에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지금은 우리가 결혼 준비도 그렇고 집 전세대출도 그렇고 좀 빠듯한 것 같아. 우리 돈 없어."
나는 화가 나서 대답했다.
"내 이름으로 대출받으면 돼."
오빠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다시피 평화 이름으로 대출받으면 이율이 높아. 그렇게 급하다고 생각되면 차 사자."
차 구매는 불과 이틀 만에 결정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들 부모님께 인정도 받았고 주 3일만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전에 비해 더 지쳐갔다. 병행할 직장을 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쉬는 날은 집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가정과 회사와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회사에 올인하다 보니 오빠의 불만도 늘어갔다.
"평화야 왜 전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지? 진짜 괜찮아? 일도 줄였는데 왜 더 바빠?"
퇴사를 결정을 할 당시만 해도 퇴사가 내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점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이직이 자기 파괴적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명확해져 갔고 나는 또 방황을 시작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봐. 어떤 일을 해야 하지?'
내가 짊어진 책임감에서 벗어나 도피하고 싶었고 나는 그 무게를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빠에게 또다시 무서운 변화를 예고했다.
"이번 연도 마치고 나 다른 일 해볼까? 공무원 준비할까? 아니면 그냥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을까?"
오빠는 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고 한참 후 대답했다.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평화는 남들 앞에서 있어 보이는 거 좋아하잖아. 그리고 공무원 준비는 하고 싶다면 지금 쉬고 있는 날부터 준비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아니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직업적성검사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직업에 너무 한계를 가지지 마. 어제 보니까 TV에서 여자 버스운전기사도 나오더라."
나는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오빠의 등을 두들기며 이야기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우리 가족, 친척 다 운전으로 먹고살잖아. 나라고 못하겠어? 나 운전기사 도전해볼래."
그렇게 나는 버스기사가 되기 위해 운전면허학원에 문을 두들겼다.
1) 매슬로우의 욕구단계는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생리적ㅡ안정ㅡ사회ㅡ존중ㅡ자아실현의 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