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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 Feb 19. 2022

즐거운 성생활과 힘든 임신준비

ADLs와 IADLs의 어딘가쯤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는 이제 3년 차, 나는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어린 왕자에서 말하는 딱 시시한 어른이 된 걸 지도 모른다.

글의 문맥 상 뜬금없지만 제주도로 여행 가는 걸 진짜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가서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건 아니다. 마음에 혼란이 많을 때 제주도를 방문하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는데 이제 내 마음속에 제주는 그 자체로 위로이자 이십 대의 내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소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 같다. 몇 번의 제주 방문, 몇 년 차 부부, 기념일 날짜 등을 계속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그 순간, 시간들이 다 의미 있었고 행복했기 때문에 숫자로 표현을 해서 시간을 내 옆에 두고 싶어서다. 숫자는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내가 써 내려가는 나의 역사가 내 삶이 너무 소중해서 숫자가 주는 무게감이 좋다. 이제 내 역사는 인생 세 번째 막을 열 준비를 시작했다.


임신 준비의 시작은 사실 난임 병원에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다.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난임 병원에 간 것은 아니다. 그곳에 가면 정자와 난소 나이를 바로 측정해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수치로 표현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확인받고 싶었다. "모든 것에는 늘 때가 있다"라고 하는 어른들의 뻔한 말씀들에 콧방귀를 뀌다가 아이를 원하는데 생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아이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한 가족 구성원을 받아들일 때 한 사람의 독단적인 생각으로 추진된 의사결정은 나쁜 결과에 도달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강아지 라떼를 입양했을 때처럼 오빠를 강하게 밀어붙여서 힘듦을 결단코 주고 싶지 않고 나도 겪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빙하기를 겪고 찾은 평화를 사수해야만 한다. 오빠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을 눈치 보며 기다렸다가 내가 생각한 적절한 순간에 주사위를 던졌다.

 "우리 산전검사라도 받아보는 건 어때?"

어? 그런데 생각보다 오빠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지금 당장 가지자고 할 건 아니지? 우린 정말 딱 검사만 해보는 거야."

"아싸 당연하지. 예약 잡는다."


우리가 병원을 갔을 때 자동문이 열리고 보이는 풍경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저출산 시대라는데 병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 자극이 강렬했다. 첫 방문이라 그런지 피임방법, 결혼한 시기, 생리상태 등 전반적인 부분을 체크하는 설문지를 주셨는데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았다. 우리 몸상태가 꼼꼼하게 체크되는 것 같아서 선생님을 만나기도 전에 만족스러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선생님 방문을 열었는데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난임 병원에 대한 좋은 편견이 생길 뻔했다.

"안녕하세요.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선생님의 표정과 그 문장을 들은 순간 선생님에 대한 확신이 들었는데 내가 금사빠였는지 새로운 나의 모습을 또 발견했다. 선생님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드렸고 선생님은 꼭 가까운 지인 상담해주듯 적극적인 태도로 우리를 바라봐 주시는 것 같았다. 이미 콩깍지가 씌어서 사실 모든 게 다 좋아 보였고 즐겁게 검사를 받았다. 이렇게 물 흘러가듯 결과까지 만족스러우면 좋으련만 변곡이 까꿍 하고 고개를 내밀며 찾아왔다. 내 나팔관 한쪽은 상태가 좋지만 나머지 한쪽이 막힌 것은 아니되 애매한 상태라고 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마음이 우울해졌는데 바로 연달아 들은 오빠의 검사 결과 소식에는 내 마음이 너무 감당이 안됐는지 놀라서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네????? 기형정자증이요? 그럼 저희는 임신이 되면 기형아를 낳게 되는 건가요?"   

선생님은 기형정자증이 기형아 출산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셨고 다만 자연임신 확률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이 소식을 들은 오빠는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안심을 하기 위한 용도로 검사를 받고자 했던 건데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멀어졌다. 선생님이 달력을 보여주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세 개의 날짜를 콕콕 집어주시며 이때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으니 나는 힘을 내서 오빠에게 물었다.

"우리 임신 준비 앞당길까?"

오빠는 절망에서 헤엄치느라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나 보다.

"아니. 나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내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줘."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오빠한테 다시 물어봤다.

"우리 임신 준비 어떡하지?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오빠는 그렇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마음이 아파서 그런 것을 머리로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조바심을 느끼는 나와 달리 오빠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미웠다. 속도가 단순히 느린 게 아니라 임신 준비가 우리의 공동목표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는 들었고 우리 부부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것 같아 외로웠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오빠 마음 아플 수 있어. 이해해. 그리고 속도가 빠른 사람이 속도가 느린 사람을 맞춰 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해. 그래도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만큼은 같았으면 하는데 오빠도 임신 원하는 거 맞지? 확인받고 싶어. 만약 그렇다면 영양제라도 몇 개 먹어주라."


오빠는 내 말에 수긍했는지 영양제를 매 달 잘 챙겨 먹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번 달부터 오빠도 임신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오빠에게 에로스적 사랑을 어필했다. 그런데 숙제를 해야 한다고 강박을 느껴서일까? 오빠는 힘을 내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제는 임신될 걱정 없이 사랑을 나눌 수도 있고 몸매도 이 정도면 좋고 가슴도 몸에 비해 크고 얼굴도 예쁜데 내가 매력이 없어?"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 자존심도 너무 상하고 이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났다. 오빠는 나한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자신이 어떻게 해야 내가 좋아할지를 생각하다 보니 즐길 수가 없단다.

'말이야 방귀야'

말이 나온 김에 오빠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오빠랑 하는 섹스 솔직히 나 너무 재미없어. 너무 정직해"

넷플릭스에서 '섹스 라이프'를 틀어놨었는데 오빠가 티비를 바라보면서 우리 상황이 딱 지금 저런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다음 날 점심시간 무렵에 띠리링 오빠에게 카톡이 왔다. 이 사람 참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려는 정직한 사랑은 재미가 없는 것 같아. 이제 재미있는 걸 생각하면서 해 볼래!

사랑이 꼭 한 가지 모양일 수는 없고 좋아하는 게 늘 그거일 필요도 없으니까. 나도 많이 도전하고 노력할게! 불편한 거 잘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우리는 잠옷 소재를 바꾸고 집을 벗어나 숙소를 잡아보기도 하고 성생활 코치 유튜브를 같이 보기도 했다. 반려 기구를 같이 검색해서 사보기도 하고 웃긴데 이런 우리가 참 좋다. 오빠와의 섹스가 더욱더 좋아지려 한다. 이렇게 노력하는 우리를 보고 아기도 분명 감동 받아서 예쁘게 꽃단장을 마치고 내 뱃속에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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