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용은 안 하는 것이 틀림없다
*실제 경험에서 일부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꽤나 어릴 때부터 꼼꼼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들으며 자랐다. 아마도 나의 저주받은 완벽주의와 인정욕구, 타고난 불안 등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하간 초등학생 때부터 꼼꼼 그 자체였던 나는 그 덕분인지(?) 암기를 잘해 시험을 곧잘 보곤 했다. 시험을 잘 보는 건 좋은 거니까, 내 꼼꼼한 성격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떤 일을 초래할지 모른 채로 그 꼼꼼함을 강화시키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나는 꼼꼼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특히 팀의 막내일 때는 정산 등 중요하진 않지만 틀리면 골치 아파지는 잡무들을 많이 맡았는데, 그런 일들을 큰 실수 없이 잘 해내니 선배들이 참 좋아했다. '우리 막내가 꼼꼼해서 정산도 잘하고 회의록도 잘 쓰잖아!' 하는 애정 어린 말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내 연차가 쌓이면서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막내를 벗어난 나는 정산이나 잡무에서 슬슬 벗어나 더 본격적인 업무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늦게 들어온 막내가 '꼼꼼하지 못한' 성격을 가진 데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후배는 뻔한 숫자 계산을 자꾸만 틀리고, 한번 더 체크하면 되는 걸 안 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부서장님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자꾸 문제가 생기니까 안 되겠어. 꼼꼼한 ㅇㅇ(나)가 결재받기 전에 한번 더 검토해 줘.' 결국 나는 더 꼼꼼하고 실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무를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했다.
사진: Unsplash의Matteo Vella
더 큰 문제는 내가 대리급 이상이 되면서 발생했다. 팀에서 업무분장을 할 때, '틀리면 안 되는 업무'가 나에게 집중 배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업무는 뭐 다 거기서 거기니까, 어떤 업무를 하든 상관없다... 고 처음엔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업무의 난이도를 떠나 성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틀리면 안 되는 업무'라는 것은 디폴트가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태'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가산점을 받기는 어려운 업무인 것이다. 한편 조금이라도 틀리면 티가 확 나서 감점을 받을 확률 또한 높은 업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틀리면 안 되는 업무'가 아닌 '새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업무'나 '기존 것을 개선하는 업무' 등은 결과물을 내서 득점하는 게임이지 실수로 인해 감점되는 게임이 아니므로 태생부터 유리(?)하다. 꼼꼼하다는 이유만으로 '틀리면 안 되는 업무'를 자꾸 맡게 되면서 뭔가 손해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작성한 걸 취합해서 정리하는 경우, 취합자가 보통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지 한번 더 검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내가 내 부분을 작성해서 취합자한테 드렸더니 'ㅇㅇ씨(나) 건 알아서 잘했겠지 뭐. 그냥 넣을게~'라고 하던 선배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틀려도 한번 더 기회가 있지만 나는 틀리면 진짜 끝 아닌가? 이러면 오히려 꼼꼼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이런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점점 내 불만을 강화했다.
매우 슬프게도 이 성격이 가져온 불행(?)은 하나 더 있었다. 나에게 배분되는 업무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 부서이동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꼼꼼하고 틀리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성격의 업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창의적이고 아이디어를 내서 실행하는 업무를 선호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바라보는 나는 그저 '꼼꼼하고 성실한 사원'일 뿐이었다. 그 평가에 따라, 나는 인사 시즌에 몇 번이나 '꼼꼼한 사람이 잘하는 부서'에 끌려가거나 끌려갈 위기에 처해야 했다. 그때마다 '꼼꼼하다'는 그 긍정적 평가가 나를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물론 내가 '꼼꼼하다'는 평을 들어서 겪은 긍정적인 일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상사로부터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공공기관에서 생활할 때 매우 중요한 평판에도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회의를 하다 어떤 이상하고 골치 아픈 업무가 갑자기 생겨났을 때 부서장님의 '이건 ㅇㅇ씨(나)가 꼼꼼하니까 ㅇㅇ씨(나)가 해서 줘라'는 지시를 들으면, 어딘가 억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와서 꼼꼼하지 못하게 사는 건 그른 듯하니, 그 성향에 대해 인정해 주는 문화라도 좀 더 생겼으면 좋겠다. 안 틀리다니, 정말 잘했어! 100점!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