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더라도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초보라 매사 당황당황하며 조심스럽게 다니는 시기, 일에 재미를 붙여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하며 불태우는 시기,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모든 게 짜증 나는 시기 등등..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만두지 못해 다니는 시기를 지난 몇 년간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재미있는 건, 매 시기마다 내 업무 책상의 상태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신입 때는 기억하고 외워둬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모니터를 비롯해 책상 사방팔방에 포스트잇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적어 붙여놓았었다. 한창 열심히 일할 때는 각종 서류와 연구보고서들을 키보드와 마우스 옆에 잔뜩 쌓아놓고 너저분한 책상에서 일했었고. 그리고 모든 게 짜증 났던 시기에는, 그 모든 쌓여있던 책들과 서류들을 싹 버리고(사실 버리자면 버릴 수 있는 서류들이었다) 퇴사가 결정되면 가방만 들고 떠날 수 있도록 책상을 깨끗이 썼다. 개인물품은 전혀 쓰지 않았고, 서류들도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만 인쇄하고 필요 없어지면 바로 파쇄했다. 회사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회사에서 내 존재감을 지운 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가슴속에 말 그대로 사직서를 품고 언제든 내 선을 넘는 일이 벌어지면 제출할 준비를 하고 지내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도 지나고 나자, 이제는 슬슬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생각은 점점 커져갔다. 바로바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
20대 때 내 최애 미드는 뭐니 뭐니 해도 <크리미널 마인드> 시리즈였다. 특히 초반 1~4 시즌은 DVD를 사서 돌려볼 정도로 좋아했었다. 갑자기 여기서 크마 얘기가 왜 나와? 싶겠지만, 다 맥락이 있다. 아직 대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는 <크리미널 마인드>에 등장하는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 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가르시아'라는 캐릭터에 나를 이입했다. '가르시아'는 천재 해커로, 현장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다니는 다른 요원들과 달리 본부에서 컴퓨터를 통해 범인의 정보를 탐색하고 요원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늘 FBI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극 중 가르시아의 책상이 내 눈길을 끌었다. FBI에 어울리지 않는 온갖 핑크핑크하고 복슬복슬하고 반짝반짝하는 장식품의 향연! 해커답게 어딘가 괴상하지만 완벽히 어울리는 옷을 입고 그에 지지 않는 화려하고 귀여운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물론 그런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보다 프로답게 일하는 모습이 합쳐져 더욱 멋지게 느껴진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며 생각했었다. '나도 나중에 일하게 되면 꼭 가르시아처럼 사무실을 꾸며놓고 일해야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회사에서 억눌려있던 나를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내 머릿속에 <크리미널 마인드>의 가르시아가 떠올랐던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극 중의 가르시아처럼 엄청난 책상을 만들지는 못해도, 지금처럼 오직 사무에 필수적인 것만 꺼내놓고 사는 삶은 그만 살기로 결정했다. 본격 회사를 내일 그만두더라도 오늘은 나답게 살아보자 프로젝트!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행이 돌고 돌아 돌아온 '다이어리 꾸미기'를 요새 사람들은(?) 줄여서 '다꾸'라고 부른다더라. 이게 한동안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재미있는 트위터 사람들이 '다꾸'에서 시작해서 모든 행위를 '~꾸'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예를 들어 석사생이 논문 쓰는 행위를 '논꾸'라고 한다든지^^;; 그래서 나도 내 책상을 꾸미는 '책상꾸('책꾸'라고 하면 '책 꾸미기'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책상꾸'라고 해본다)'를 하기로 결정했다. 책상 파티션에 망원동 소품샵에서 사 온 귀여운 엽서들을 인터넷에서 구매한 깜찍한 자석들로 붙여 두었다. 반대쪽 파티션에는 홀로그램 쿠로미가 그려져 있는 엽서들을 여러 개 장식. 모니터 옆 메모보드는 캐릭터가 그려진 한눈에 들어오는 매우 튀는 것으로 바꾸고, 메모도 캐릭터 메모지로 바꿔서 조금이라도 더 귀엽게 꾸몄다.
책상 위에는 귀엽고 커다란 캐릭터 봉제인형을 몇 개 가져다 두었고, 모니터 받침대 위에는 열심히 하고 있는 캐주얼게임 캐릭터 피규어들을 주루룩 늘어놓았다. 요즘 잘 나가는 뚱랑이 캐릭터 스트레스볼도 슬쩍 올려두고. 스테이플러는 분홍색 마이멜로디가 그려진 걸 직접 사다 갖다 놓았다. 그렇게 핑크핑크하고 귀여운(?) 책상 꾸미기가 완성되었다.
사무실 책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일하러 왔으니 일 관련된 것만 놓아두어야 한다는 사람부터 회사에 두고 쓰는 물품을 왜 개인 돈으로 사냐 하는 사람까지.. 사실 책상은 사무실에 있지만 개인 공간이니까 모두의 말이 맞다. 각자 원하는 대로 (과하지 않은 선에서) 자기 책상을 관리하면 된다. 나는 사실 요즈음은 약간 과하게 꾸미고 살고 있지만^^;; 그에 따른 만족감은 상당하다. 일하다 스트레스받으면 나의 핑크핑크한 인형과 엽서들과 피규어를 보며 잠시 힐링한다. 일만큼은 누구보다 멋지게 해내는 <크리미널 마인드>의 가르시아처럼 프로의 자세로 일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한다. 공공기관에서 이러고 사니 불필요한 관심(다른 직원들이 내 책상을 그렇게 구경하러 온다)을 받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인걸! 당장 내일 그만두더라도, 오늘만큼은 나답게 '책상꾸'를 하고 살고 싶은 마음. 이게 바로 나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