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호수 May 31. 2024

저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교도소에 살게 해 주세요. 

내가 주로 보았던 수용자들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형량을 조금이나마 낮춰보고자 매일같이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하거나 심신미약 등을 증명하기 위한 양형자료를 제출하곤 했다. 정작 그들이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피해자인데 법정에 나가보면 자신에게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할 수도 있는 판사에게 눈물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다. 


자신의 죄를 쿨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수용자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피해자가 어떻게 느꼈을 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언뜻 보면 건장한 체격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도인과도 같아 보였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왔다. 와의 면담은 여느 일반적인 수용자와는 매우 달랐다. 일반적인 수용자들은 재판과정에서 본인에게 이익, 불이익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 집요하게 묻거나 재판 과정에서의 행정적인 사항들에 대한 질문을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죄의 유무를 떠나 본인에게 최대한 가벼운 형이 내려져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주임님... 저는 여기 들어온 거 하나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여기 들어올 짓 했고요. 벌 받아야 합니다. 검사님한테도 가서 제 죄 다 인정할 거고요. 법정에 가서 판사님께도 제 죄를 깨끗하게 다 인정할 겁니다."


내가 물었다. 


"그래도 항소는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지금보다 형기가 조금이라도 줄 수도 있는데.. 본인의 권리이기도 하고..." 


그가 답했다. 


"아닙니다. 주임님. 판사님께서 벌주시는 만큼 그대로 받을 거예요. 제가 지은 죄 부인하면 나중에 더 천벌 받습니다. 제가 무서운 건 여기서 몇 년 더 살고 그런 게 아닙니다."


점점 대화가 산으로 가는 듯했지만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되물었다. 


"그럼 XX 씨는 뭐가 무서운데요?"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진짜 무서운 것은 제가 죽어서 하늘에서 받을 심판입니다. 제가 여기서 징역 좀 덜 살겠다고 부인하고 그러면 나중에 있을 심판에서 더 큰 벌을 받을 거예요. 저는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그는 종교가 있는 듯했다. 무슨 종교인지를 떠나 그의 신념을 존중했다. 


" XX 씨는 정말 좋은 신념을 가지고 계시네요. 다른 수용자들도 XX 씨 같은 마음으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면 좋을 텐데... 꼭 나가셔서도 이런 좋은 마음으로 사시고 다시 들어오지 마세요."


나는 진심으로 그의 태도에 박수를 보내려고 했었다. 

그의 사건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알고 보니 그는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법자'였다. 법자는 법무부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법무부가 이 사람의 생계를 해결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밖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노숙생활이 너무 힘드니 교도소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어차피 교도소에서는 따뜻한 밥도 삼시세끼 먹을 수 있고, 운동도 시켜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입을 옷도 주니 그의 입장에서는 노숙생활보다 백만 배 나을 터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만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아 교도소에서 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쿨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척했던 것이다. 


간만에 진심으로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수용자를 보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잠깐 품어보았지만 

그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실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희망을 아직 버리지는 않았다. 

이전 17화 담임 기피현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