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2016년 초. 미국 동부에서 시작해 서부, 남부를 돌고 스웨덴, 네덜란드까지 3주짜리 장기출장을 떠났다. 미 동부 보스턴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하버드비지니스스쿨과 MIT에서 인터뷰가 있었다. MIT에서 니콜라스 애쉬포드 교수님을 만난 장면이 떠오른다. 세계적인 석학인데도, 의외로 소박하고 아날로그적인 사무실이 마음에 들었다. 낡은 책 냄새가 은은하게 코를 자극했다. 노교수의 서류가방은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낡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아우라가 담긴 가방이다. 첫인상부터 주인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한 소품이었다.
교수님은 사회를 유지하는 세가지 중요한 축이 있다며 '3e' 모델을 설명했다. 피고용자(employment)와 환경(environment), 경제(economy) 세 축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단 얘기였다. 인류는 산업발전이란 명목으로 화석 연료를 마구 썼다. 환경과의 균형을 포기했다. 노동자들은 무리해서 일했다. 피고용자들과의 균형을 포기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엔, 세 축이 상생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 4일제를 얘기했다. 요즘 주 52시간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걸 보면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보스턴 일정엔 당시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친구가 함께 했다. 일을 마치고 보스턴 여행을 즐겼다.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곁들여 오이스터 요리를 먹었다. 요즘엔 한국에서도 비슷한 컨셉의 식당이 많아졌더라. 한국식당을 굳이 찾아가서 굳이 15불짜리 소주를 주문해, 굳이 소맥을 말아먹었다. 어디서든 우리다웠다. 보스턴에선 크램차우더가 유명하다고도 했다. 크램차우더도 먹고 안주거리를 사려 유명한 퀸시마켓으로 향했다.
쌀쌀하니 추운 날이었다. 배가 부른 상태로 시장에 간거라 뭔가 더 먹을 욕심이 나진 않았다. 그러던 순간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70대 정도로 보이는 남녀가 계단에 걸터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어 그 순간을 담았다.
이분들이 어떤 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장면 자체가 아름다웠다.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추운 날씨에도 빛났다.
나이를 먹는 게 두렵다. 사회적 역할, 책임감이 늘어나는 두려움보다 신체가 늙어가는 두려움이 더 크다. 신체적 매력이 점점 줄어들텐데, 누군가 늙어가는 나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내가 늙어가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사랑을 유지한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60대 중반에 접어든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를 보면 설렌다고 한다. 함께 한 지 40년이 넘었다. 두 분은 서로를 존경한다.
물론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변하거나 무뎌진다. 그 권태감을 견디기 힘들어 이별하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지인들에게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이 사진을 선물하곤 한다.
오래된 사랑. 낡았다기보단 품위가 더해진 MIT 교수님의 서류가방과 비슷한 매력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