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식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희로애락이 한두 가지겠냐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운 기억은 쉽게 씻기지 않고 문득문득 속에서 기어올라와 알아달라는 노크를 한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해 보고 또 합리화와 변명도 해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명료해지는 양심의 측량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대가이리라. 그 부끄러웠던 일을 감추기만 하면 도리어 상처가 될 수 있으나 의도적으로 꺼내어 공개하면 혹여나 용기 있게 마주할 힘이라도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에 한 번 도전해보려 한다.
밖을 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보는 자는 깨어난다고 융은 말했다. 세상이 곧 스스로의 의식이 만든 환영인데 그 환영 속에 파묻혀 사는 이는 꿈을 꾸고, 그것이 환영인 줄 알고 그 환영을 만든 스스로의 내면에 의식을 주목할 수 있으면 그것이 깨어남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 부끄러웠던 일들도 결국엔 저 밖의 일로 인한 상처였다고 강하게 부르짖던 마음이 잦아들고 결국 내 마음이 만든 것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음에 다만 부끄러운 일로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부끄러움은, 내가 존경하는 인생의 스승에게 한 행동이었다. 이십여 년 전, 처음 명상이란 것을 시작했을 무렵에 명상이란 내게 살아도 될 만한 존재라는 존재감을 가장 인정해 주는 그런 도구였다. 과한 자신감과 함께 이유도 모르는 우울감을 오르내리던 내게 명상은 특별한 존재라고 인정해 주는 하나의 장식품이기도 하고 상장과도 같은 상징이기도 했고 우울함 대신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 같은 것이기도 했다. 가끔 내용물보다 더 빛나는 포장제로 겉이 더 반지르르한 선물을 받으면 부담스럽거나 실망스러울 때도 있는데 내 내면을 그렇게 숨기고 포장하고 싶을 때면 아무도 모르게 포장할 수 있는 빛나는 포장제 같은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스승이 그 수십 명의 공부꾼들이 듣는 가운데 갑자기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스승의 마음은 진정 아끼는 마음이었으련만 빛나는 포장제로 가득 에워싼 자신에게는 그 포장제를 억지로 벗겨버리는 듯한 공격으로 여겨졌으리라.
"산수님, 그러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배우는 사람이지만 아무도 당신보다 못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월감은 가지는 정도만큼 스스로를 좀 먹습니다......"
그 때 나는 십여 년 이상 명상모임을 이끌어 왔었다. 마음만큼 모임 사람들의 열의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했고 나 역시 그에 따라 실망과 아쉬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곤 했다. 우월감은 스승이 한 말이었지만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모임을 그만두려고도 했던 때였다.
'그렇게 애써가면서 이 소중한 것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한테 그렇게 가혹한 말을 하다니, 우월감이라니.'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강의를 마치면서 자리를 뜨려 했다. 내 표정을 살핀 도반이 얼른 손을 내밀어 왔다. 무슨 일인지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내 표정이라니, 토마토처럼 진실한 성품의 드러남이 아니라 유리알처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보호막이었다.
결국 얼마 뒤 다른 공식장에서 스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받았다. 스승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리고 모자란 제자의 화를 삭여주느라 진심 어린 사과를 해주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스승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자신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흔적이 있을 때마다 공개 사과를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사과하는 지라 나는 스승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직면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그분은 진정으로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 잘못이란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사과한다는 그 자체를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이는 나자신이었던 것이다. 스승은 도리어 아무 잘못이 없다고 인정되더라도 그의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사과했던 나의 스승은 내게 사과의 개념 자체를 바꿔준 분이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 눈에 비친 스승은 내가 만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만든 내면은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음으로 가득 하나 진정한 조언을 받아들이기 힘든 유리병 인격이었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스치면 다 드러내고 조금이라도 부딪힐라치면 깨질 듯 소리를 지르는. 그렇게 부끄러운 인격의 일면은 아득하니 오래전으로 멀어진 듯했으나 아직도 이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다만 그 색채가 그렇게 두껍지만은 않고 진하지만은 않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어찌 그 일 자체가 그런 색깔이겠는가. 다만 그 색깔을 입힌 스스로가 어떤 시선으로 그 일을 바라보고 행동했느냐가 드러나는 것뿐.
이제는 포장 자체가 무겁게 느껴진다. 무엇이라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포장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면 의식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진실과의 차이가 그 차이만큼 의식공간에 부담을 남기는 것처럼. 그래서 그 시절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그 자체가 주는 포장 없는 진실감이 도리어 영롱한 힘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끄러웠던 기억도 그 부끄러운 만큼의 진실한 표현이 그를 다시 본래로 되돌려 놓을지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두 번째, 세 번째 부끄러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스승들과 관련된 일이었다. 가문 땅을 적시는 비처럼 온 세상에 복이 무한히 내리고 있는데 그 복을 받는 복 바가지는 결국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는, 복도 받을 수 있는 마음그릇만큼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이치라니, 스승이 주려는 그 소중한 가르침들을 내 조그만 복바가지는 그 받은 만큼도 들이키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걷어찼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진실한 표현 자체로 용기 있는 고백이요, 자기 성찰의 기회이며 더 높은 차원의 자각으로 승화할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사로운가. 부끄러움이든 아니든, 가슴에 쌓인 것이 무엇이든 밖을 향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안을 들여다보며 표현하고 성찰하며 깨우치기만 하면 그렇게 보석 같은 본성을 선물로 회복하게 해 주니까 말이다. 스스로 왜곡하면서 오래오래 감추어 눌러두지 않는다면 루미의 시처럼 그들은 모두 우리 존재를 지극한 본성으로 안내하는 안내자들일 것이다.
*추신 :칼융-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분석심리학의 개척자.
루미-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