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히말라야 6

등산과 인생

by 전종호

숙소에서 함께 출발한 한국인 부부 트레커들은 벌써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알프스 반데룽(wanderung)을 한 분들이라 행동이 민첩하고 산행에도 요령이 있다. 네팔 현지에서 가이드와 쿡, 포터들을 채용할 만큼 이곳의 사정과 문화에도 밝다. 함께 걸으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부부들의 조크와 웃음이 계곡을 밝게 한다. 부부란 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지만, 이렇게 고소를 함께 걷는 것은 뜻이 같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뜻을 함께해야 하고, 걸을 만한 체력을 모두 갖추어야 하며, 삶에서 장기간의 시간을 비워둘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지 않으면 쉽게 감행할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이란 사실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의 질서와 계획 속에서 빠져나와 한심할 정도로 느리고 무심하며 고립된 세계에 의도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짜여진 생활의 틀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과몰입된 일에서 벗어나 저 홀로 무심하고 고립된 세계를 즐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빠지고 물소리에 홀려 걷다 보니 그들과는 이미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걸음은 그들이 아니라 물소리의 리듬에 맞춰져 있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산길을 걷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등산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주말 하이커로서 전국의 산들을 오르고 내렸다. 등산 애호가 정도는 된다고 할까? 산에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도 참 많다. 등산가, 등산 애호가, 산악인, 클라이머, 하이커, 트레커, 산사람, 산사나이, 산친구, 유산객遊山客, 전문 산악인, 일반 산악인, 취미 등산가, 산인 등등.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산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구분하고 싶어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산에 다니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산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세게 산을 타는 사람들 또한 산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려 든다. 그러나 구별은 쉽지 않으며, 또한 굳이 구별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주말이면 산악회 버스가 전국을 누빌 정도인데, 전혀 산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 말마따나 산에는 주인이 없고,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산악인이다. 그렇다고 산에 오른다고 모두 산악인도 아니다. 산을 알고 등산이 삶의 중심에 박혀 있을 정도라야 비로소 산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산이 반드시 알프스나 히말라야 자이언트일 필요는 없다. 클라이밍이나 트레킹을 구분할 필요도 없다. 횟수나 높이, 등산의 난이도와 공포감 극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산에 대한 경외심과 진정한 흠모가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등산에 ‘고도보다 태도(attitude more than altitude)’라는 금언이 있다. 정상보다 정상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흔히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해 간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것이 맞겠다 싶다. 목표와 도전과 극기를 강조하는 전통적 개념이다. 등산은 높은 곳을 바라보고 가보지 않은 곳을 동경한다. 인생살이도 가보지 않은 곳,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전제로 한다. 우리에게 내일은 가보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은 희망을 가리킨다. 등산이나 인생은 무언가 희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목표가 바로 앞에 있을 것 같지만, 올라가 보면 그 목표가 너머에 있고 또 가보면 그 너머에 있다. 올라가면 내려가는 길이 있고, 길은 길의 끝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마침내 끝은 있다. 삶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사는 일의 목표 획득은 항상 쉽지 않으며, 실패의 확률이 더 높다. 차이가 있다면 인생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던져진 것이고 등산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인생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고 등산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라는 말이다.

가지 않을 수 없는 인생길에서 삶의 좌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산에서 삶의 의미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을 자주 만난다. 휴학 중이거나, 군대 가기 전 몇 달, 또는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 몇 달,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동안 히말라야와 인도를 유랑하는 젊은이들을 본다. 가망 없어 보이는 그들의 미래에 대한 낙담과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들을 자주 듣는다. 단군 이래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이 배우고도 더 나은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첫 세대인 청년들의 고민과 분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만한 또래의 아비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 하소연에 대한 공감은 늘 심장을 콕콕 찌르는 아픔을 동반한다. 무턱대고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이 시대 청춘의 절망이 너무 깊다. ‘희망을 설교하는 자, 거참 사기꾼이지. 하지만 희망을 죽이는 자는 개자식이야’라는 독일의 가수 시인 볼프 비어만의 <멜랑콜리> 노랫말에 십분 공감한다. 개자식보다는 차라리 사기꾼이 되고 싶다. 시인 김광규는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 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고 지켜야 할’ 것이라고 엄혹한 유신 시절에 희망을 노래했다. 미래는 그들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 세대도 절망의 터널을 통과해서 왔다. 대자연의 질서를 보고 ‘헬조선’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약탈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용기와 지혜, 삶의 역동성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등산은 탐구와 정복의 욕구를 수반한다. 성취욕은 어찌할 수 없으나 헛된 공명심은 사람을 산에서 추락하게도 한다. 등산이 사람과 산의 접촉과 교감이 본질이라면, 인생살이는 타인과의 교섭과 교감, 그리고 애정 어린 표현이 핵심이지 않겠는가? 산에 오르다 죽는 등산가는 있어도 자살하는 등산가는 없다고 한다. 등산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걸어가는 중년들의 산행은 몸은 힘들어도 여유 있는 길이지만, 히말라야를 헤매는 청춘의 산행은 산 아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좌절을 느끼고 절망에 우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함께 산에 가자고, 그리고 다시 한번 희망을 노래하자고 말하고 싶다.


먼 곳은 바라보지 말고/ 높은 곳은 쳐다보지 마라/ 높고 먼 곳이 목표지만/ 힐끗 갈 길을 일별하고/ 숨 고르며 오르는 지금/ 숨찬 한걸음에 집중하고/ 나중은 내려놓으라// 살다 보면/ 공부와 직업의 고개가 가파르고/ 속절없는 좌절과 실패/ 치명적인 배신에 속이 쓰리며/ 알 수 없는 까닭의/ 내리막길이 계속되더라도/ 고단한 걸음 멈추지 않는다면/ 곧 평탄의 길이 찾아오리니// 이겨내지 못할 시험도/ 못 오를 산도 없다/ 길을 걷는 마음으로/ 젊은이여/ 순간을 기쁘고 가볍게 살라/ 한 고개 넘어서면 먼동이 터오고/ 험한 봉우리 하나 더 오르면/ 떠오르는 해가 너를 비추어 주리라// <큰 산을 넘는 법- 젊은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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