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거기에 계단공포증을 곁들인.
계단 공포증 소유자의 간 큰 도전
걷고 싶은 날.
서울 태생의 뚜벅이 한 명은 지하철에 올라탄다.
예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당일치기 코스가 있었으니, 그 곳은 바로 남산.
이 곳을 과거에 안 가봤던 건 아니다, 다만 '혼자' 가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딱히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왠지 이 곳을 방문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졌었다.
혼자여서? 그건 아니다.
계단.
나는 계단 공포증이 있다.
그런데 남산 하면 바로 계단의 향연 아니겠는가.
하지만 언젠가는 남산에 혼자 꼭 가 보고 싶었고, 내 맘 속에 정해 놓은 날은 바로 이 날이었다.
계단 공포증이 있지만 날이 맑으니까 괜찮을 거야 - 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장착하고, 계단을 최소화 한 채 길게 뱅 돌아가는 오르막 코스를 머리 속에 새겨 두었다.
시작은 을지로3가역
을지로 3가역에서 내린 후, 한 중국집에 들어간 나는 식사를 거하게 망쳐 버렸다. (국물 한 숟갈 떠 먹는 순간 쉰 짬뽕이 나온 줄 알았어)
다소 좋지 않은 컨디션에 커피 생각이 간절한 채로 나들이 시작.
저 멀리 보인다, 남산타워가.
내 오늘 너의 얼빡샷을 찍어주겠다 이것입니다.
(* 얼빡샷 : 얼굴로 꽉 채운 사진)
그리고 잠깐 부러웠던 강아지 한 마리 찰칵.
원래 나의 예상 코스는 동대입구역에서 시작하여 국립극장을 우측에 둔 채로 걸어가는 코스였지만, 을지로 3가역에서 동대입구역까지는 얼마 안 걸리니 전체 코스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지장이 있었다.
나는 을지로3가 역에서 출발할 때 남산 타워를 정면으로 두고 가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
길을 올라가며 한 컷.
어차피 이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얼굴을 드러낼 계획이 없기에 tmi를 살짝 풀어 보자면.
내가 계단을 무서워 하는 이유는 나의 가족 중 동일 인물 한 사람이 뒤에서 나를 여러 번 밀었고, 그 중 엎어져 얼굴을 다친 적이 두 번 있기 때문이다.
아가 때 계단 위에 서 있다가 굴러 떨어진 것 한 번.
초딩 때 올라가는 길에 뒤에서 떠밀려 계단에 얼굴을 박은 게 또 한 번.
입원까지는 안했지만 피를 참 많이 흘리고 며칠간 얼굴에 밴드를 범벅한 채로 울었던 쪼꼬미 시절의 날을 보낸 후 나는 계단을 오르는 게 두렵다. 그게 벌써 30년을 넘긴 기억인데도 참 벗어나기가 힘들더라.
특히 잡을 것 하나 없이 덩그러니 펼쳐진 계단이나, 디자인에 모든 스탯을 몰빵한 듯한 나선형 계단을 보면 머리가 핑 돌며 아찔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대체 이런 곳을 사람이 어떻게 다녀?
하지만 알고 있다.
어린 아이도, 강아지도 제법 가벼이 뛰어다니는 곳이 바로 계단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미술관에 가서 사족보행을 한 적이 있다. 친구는 '쟤 뭐해' 라는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으로 어린 아이가 웃으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내가 계단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날인 동시에 자괴감을 많이 느꼈던 날이기도 했다.
뭐, 이걸로 일단 tmi 끝.
이미 늦은 다음 지도를 보면 뭐하니
하도 오랜만에 온 남산이라, 주변에 딱히 위치를 파악할 지형 건물도 없는 터라 다소 늦은 타이밍에 불안감에 휩싸여 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 코스는,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하던 '그 길'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난 화장실마저 급했다. 역에서, 식당에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만석이어서 그냥 나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며 두 배로 초조해졌다.
아이고야.
화장실은, 계단을 올라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이 곳은 내가 가장 기피하던 그 곳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간절한 상황은 무얼까.
공포? 다급함?
나의 결과는 허무하게도, 다급함의 승리.
화장실을 위해 기나긴 거리를 돌아갈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산뜻해진 마음으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다시 펼쳐진 파란 하늘과 계단을 보는 순간, 남산 정복의 욕구 마저 눈녹듯 사르륵 하고 사그라드는 간사한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가면 나는 화장실을 위해 부실한 점심을 사먹고 남산 길목까지 땀 흘리며 올라온 사람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잡을 것 없는 계단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존엄성은 꼬깃꼬깃 집어 넣어야 한다.
만약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2025년 4월에 남산을 오르신 분이 계시다면, 그리고 거기서 기어가고 있던 정체불명의 성인 한 명을 발견하신 적이 있다면, 우리는 오프라인에서 스쳐지나간 인연이 맞다.
여튼 그 와중에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이 참 야속했고, 그 사이로 배달된 꽃의 향이 참 달콤했고, 하늘은 참 파랗고 예뻤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너와 나의 물리적 거리.
바람은 쿠팡 새벽 배송보다 빠르게, 나에게 달콤한 꽃 향기를 선사해 준다.
용기를 내서 계단을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7할은 라일락 덕인 것 같다.
해냄
멍하니 두 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다 보니, 못갈 것 같은 곳에 도달해 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세.
반가운 마음에 난간 부여잡고 사진 찍기.
이후로 조금 신이 나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발휘해 본다.
이후로 눈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컬러의 사랑의 증표들, 무심하게 덩그러니 놓여진 팔각정.
거기에 푸른 빛을 뽐내는 하늘은 서비스.
서울 사람이지만 촌뜨기인 나는, 기념품 샵에서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냉장고에 붙일 마그넷도 사 본다.
이 날의 목적은 남산 타워를 화면 한 가득 채우는 사진을 예쁘게 찍어 보고 싶었던 것인데, 사실상 너와 나의 키 차이로 인해 얼빡샷은 무리.
푸른 하늘은 참 예쁘다, 이 맛에 많은 분들이 등산을 하는 건가 - 라는, 고작 남산 한 번 올라간 거 가지고 별별 거창한 생각은 다 하고 내려왔던 4월의 오후.
삘 꽂힌 김에 다음 코스로, 해방촌에 가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려오는 길에 의도치 않게 찍어 버린 남산타워와 무지개의 커플샷.
하면 되긴 함, 무서워서 그렇지
사실, 무언가를 함에 있어 '절대 못 해, 절대 안 돼'라는 건 없다.
하면 되기야 하지, 닥치면 다 하지.
그 과정에서 식은땀이 나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들어서 그렇지, 뭐든 하면 되게끔 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 가운데서도 닥치면 할 건 다 해 왔다. (책임감 이라는 명목 하에)
트라우마는 나를 얽어매긴 하지만, 반드시 그 상황을 피해야 하는 헌법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괴로운 이유는, '내가 원하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해낸 것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쉽게 깨지는 건 아니기에 나는 여전히 그 상황이 무섭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혼자 지내는 요즘의 나는, 내가 두려워 하던 것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고 다독이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 내 마음을 다독이는 게 좀 더 익숙해지면, 그래서 내가 가진 공포증 중 하나인 계단 공포증이 조금 사그라들게 된다면, 그 때는 난간이나 내 옷깃을 부여잡던 손에서 조금 힘을 뺀 채로 계단 주변으로 펼쳐지는 세상을 좀 더 만끽하며 남산을 다시 한 번 올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