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현 May 19. 2024

우리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진짜 나란 무엇일까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이 문장은 미국의 에세이스트 비비오 고닉의 책 제목이다. 대도시 뉴욕에서 홀로 살아가는 저자는 거리에서, 상점에서, 버스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의 순간을 기록한다. 때론 직접적으로 섞이지 않고 먼발치에서 관찰하며, 때론 타인의 소식을 건너건너 전해 들을 뿐이다. 마음을 터놓는 친구들과 연락하고 만나지만 그런 관계조차 온 힘을 다해 연기한 후 무대 뒤에서 방전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고닉은 사람들과의 얕은 관계를 고독하게 그려내지만, 그 가벼움이야말로 그녀에게 자유를 느끼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이 책 제목은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 모두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존재라는 낡은 비유가 전부가 아니었다. ‘보이는 나’는 상대방을 의식하는 일인데, 의식하지 못하는 관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상대방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공간에서 ‘보이는 나’는 (나도 모르게) 풀가동 상태다. 그런데 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관객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약간 민망해졌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빠르게 걸으면서 몰래 방귀를 발사했는데, 누군가에게 걸린 기분이랄까. 이 숨은 관객들은 주로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두각을 드러낸다. 길에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졌을 때. 음식물을 잔뜩 흘린 옷을 감추고 걸어야 할 때. 민망스러운 순간 우리는 시선을 느낀다. 사실 그 시선은 내면에서 더 확장된다.     


거리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면, 유일한 피신처는 역시 나만의 방이다. 혼자인 공간에서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구 널브러져 있을 수 있다. 정말 편안하다. 그렇다면 방 안에서 마구 헝클어진 나야말로 진정한 자아일까. 존재가 둘로 분열된 것 같다. 시선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나로. 연기하는 나와 연기하지 않는 나로. 혼자 있을 때는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아폴론의 세계에 있는 것 같다. 밤의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모두 풀어져 버려 그동안 고심하던 문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낮의 아폴론의 세계에서는 지난밤의 감정의 부스러기를 치우고 내게 부여된 역할을 해내기 위해 합리인 해결책을 찾는다. 방에 나를 계속 가둬둘 수는 없다. 투덜거리며 다시 세상살이의 가면을 쓰고 나온다. 하지만 방을 나오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영하의 <다다다>라는 책에는 인간의 연극적 자아의 속성에 대해 놀라운 통찰이 나온다. 한 무대 연출가와의 대화였다. 연출가는 연극을 보는 걸 지겨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연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자 김영하는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연출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에게는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아, 연극적 자아가 인간의 본성이라니! 이 문장을 마주하고 너무 놀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늘 서글퍼했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부여된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보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니 인간관계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단념했다. 하지만 연기가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라면 연기하는 나를 그렇게까지 가엾어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김영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오히려 사람들이 연기할 수 없는 존재는 진짜 나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며 진짜 나라는 걸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늘 숙제처럼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배운다. 자아 찾기는 자기 계발 분야의 비니지스의 좋은 세일즈 포인트다. 마치 내 안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또 다른 나’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그걸 찾기 위한 전략을 소개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아 찾기는 대부분 목표를 달성하고 느끼는 성취감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자아일까. 성취한 순간의 기분이나 진취적인 성격이 나의 전부라고 오해한 건 아닐까. 오히려 지금까지 진정한 자아라는 허상적 실체에 매달려 나의 모습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면 모든 순간의 나는 내가 싫든 좋은 그냥 나다. 시공간에 묶인 리얼리티 세계에서 쪼개진 나, 분인分人이 존재할 뿐이다.      


자아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실을 부정하고 계속 허상을 좇는 건 불안한 일이다. 끊임없이 분열 상태에서 갈등만 깊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을 ‘건강한 자아로 만드는 일’로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건강한 자아는 여러 역할을 맡은 분인들 사이의 간극이 커지지 않게 밸런스를 맞추고, 한 자아의 긍정적인 요소가 다른 자아에게 영향을 끼쳐 안정적인 인격을 정립하는 일이다. 몸에 코어 근육이 있는 것처럼 건강하게 키운 코어 자아가 있으면 존재를 흔드는 절망의 소용돌이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순간의 나를 인정하는 건 어렵다. 그것은 나쁘고 어리석고 비열하고 질했던 나까지 포함해야 해서다. 못난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아가 왜곡된다. 자신을 절대 빌런이라 인식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빌런으로 둔갑시키고 자신만의 환상에 갇혀 버린다. 나는 대체로 좋은 사람인 척하고 살아가지만, 언제든지 이상하고 나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부족하고 옹졸한 나를 부끄러워하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 내가 정답이 아니라는 자기 객관화. 지나치게 회의적인가. 하지만 이런 건강한 허무주의가 세상에 더 이롭다고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