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궁극의 자유를 얻는 주문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자유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을 걸 하는 시간?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아니면 누구의 마음에 매달리지 않게 돼 비참하리만치 그리운 감정에서 벗어난 것? 아니 아니. 병들지 않은 몸과 마음이 자유 아닐까. 하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이 노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는 잡히지 않는 술래였다.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알 수 없는 일이 돼버린다. 자유의 실체를 잡으려 들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제약이 돼버리니까. 그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봤을 때, 이 문장에 닻을 내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두려움이 없는 상태. 아무리 봐도 이것만큼 자유에 대한 감각을 정확히 설명한 말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슬 퍼런 진실 앞에 팔에 소름이 돋는다. 사실 두려워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내가 도달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한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할 거 같아 무섭다. 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이 갈망 자체도 바라는 마음이니, 이로 인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자유를 바라는 마음이 나를 가두는 아이러니라니. 결국 의심 어린 추측을 해본다. 카잔차키스도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자유를 죽고 나서야 묘비명으로 쓴 거 아닐까, 라고.
그러다 다른 한 사람을 책에서 만난다.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에는 부탄의 싱크탱크를 운영하는 카르마 우라다.(이름부터 카르마라니 포스가 있다) 행복을 의미를 찾아 떠난 작가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역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카잔차키스가 환생이라도 한 걸까) 에릭은 나처럼, 아니 보통의 우리들처럼 의아해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사람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냐고. 그러자 카르마 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냈다 해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서 공연되는 연극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의 삶도 바꿔놓지 못했으니까요.”
에릭이 반문한다.(나라도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럼 카르마 씨, 우리의 가장 위대한 업적과 가장 커다란 실패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좋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보면 그게 흥미로운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40년을 놓고 생각한다면, 글쎄요. 3세대가 지나면 우리는 흔적도 없이 잊힐 겁니다.”
카르마의 말도 언뜻 다가오지 않았지만 마음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인 나의 구석기 뇌를 톡톡 깨운다 . 번개와 태풍을 신의 노여움이라 여기고, 우주와 자연과 부족의 일원으로 오늘 풍족한 식사를 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는 삶. 야생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인 하루에서 구석기인 김나현은 자유를 꿈꿀 수 있었을까. 나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자유롭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아아, 나라는 개별성의 가치는 결국 근대의 이성주의가 만들어 낸 허상인 걸까. 다시 카르마의 말로 돌아오면 그는 우리의 고정관념,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무너지기 쉬운 허상 위에 세워진 것임을 지적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괜히 반항해 본다. 난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 부모님한테도, 남편한테도, 친구한테도. 하지만 이 관계 안에서도 내 존재는 찰나같다. 카르마 씨의 말처럼 40년 안에 모두 세상을 떠나고 잊힐 것이다.
두 사람의 생각을 합쳐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추상적이고 모호했는데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 것 같다. 실제로도 효과적이긴 하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묘하게 기운이 쏙 빠진다. 잔뜩 긴장한 어깨도 풀어지고 팽팽했던 머릿속도 느슨해진다.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던 어려운 프로젝트 앞에서, 나를 무시하는 사람 앞에서, 스트레스와 분노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이 말을 떠올리면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 상사와 팀원들과 상의해야겠어 라든지. 난 이런 점이 부족해, 내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야, 저 사람도 나의 못난 점을 견디고 있어, 같은 생각들. 그러다 보면 불안했던 호흡이 점점 돌아온다.
생의 무게에 짓눌릴 거 같을 때 마음의 좌표를 자유로 돌리는 일. 이는 단순히 힘 빠지는 무력감으로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을 잘 살고 싶다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산 정상을 보면 무력해지지만,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일은 해볼 만한 것과 같다. 앞서 떠올린 구석기인 김나현과는 좀 결이 다르긴 하지만, 결국 행복의 근본은 같다.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살았다고 느끼는 것.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이런 만족은 어떤 절대적 존재를 향해 감사하고 경탄하는 마음과도 닮아있다. 삶에 대한 찬양이 아이러니하게 존재에 집착할 때보다 존재의 중압감을 내려놓을 때 나온다는 것.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질식할 거 같은 순간, 가볍게 내려놓으며 내쉰 허무의 한숨이 나를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