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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un 16. 2024

사랑의 신화가 깨질 때

진짜 사랑이 찾아왔다

타인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회사에서 같은 팀에 있는 20대 막내를 보면 연애에 목맸던 나의 흑역사가 떠오른다. 그 애가 연애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 없고, 연애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해서라고 말해서다. 그때의 나와 정반대의 마음으로 사는 그 애의 속내를 더 듣고 싶었다. 마침 그 애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20여 년 삶에서 단 한 번도 성적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어 자기는 혹시 동성애자인가를 고민해 봤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래서 성적 지향이 없는 무성애자라는 게 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애는 ‘Asexual’라는 단어는 나에게 처음 들었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게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어요?”     


그 애는 오히려 안심하는 것 같았다. 이어 묻고 답하면서 알아본 후배의 마음은 대략 이렇다. 이상향을 물어보면 대외적으로 차은우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조각 같은 외모를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나 피사체로서 여기는 것이지 이성적으로 느끼진 않는다(심지어 차은우 팬도 아니어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도 관심 없다)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못 느끼는 건 아니다. 남의 연애사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공감한다. 귀여운 동물과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가족에 대해서라면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오를 만큼 넘치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차근차근 자기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애의 표정은 점점 편안해졌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결혼 안 하고 엄마아빠랑 계속 같이 살고 싶은데, 그거 이상할 걸까요?”

“아니, 난 네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라고 생각해. 다만 누가 이상하다고 말해도 스스로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않으면 돼. 그리고 생각이나 신념은 변할 수도 있어. 아직 젊잖아. 난 이런 사람이다,라고 확고하게 정해놓지 말고 여러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

“고마워요”

“뭘, 너는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아이니까 잘 살 거야.”     


진심으로 후배의 삶을 응원했다. 동시에 20대의 나에게도. 사랑이 가득했던 나의 좌절과 패배를 쓰다듬는다. 흘러간 유행가인 ‘사랑밖에 난 몰라’를 애절하게 불렀던 아이. 굶주리듯 목마른 듯 흘러들어온 감정을 무차별하게 삼켰던 아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의 작은 흔적 하나하나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집착했던 아이.      


가족도, 종교도, 친구도, 조직도, 공동체도, 성공도, 명예도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도 마음 못 붙였던 내가 유일하게 집착했던 것이 사랑이었다. 내 마음과 닮은 한 사람만 있으면 그게 내 세상의 전부가 됐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간의 몸은 원래 붙어 있었는데 신의 저주로 반으로 쪼개지면서 평생 그 반쪽을 찾는 일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의 반쪽, 소울메이트가 나의 깨진 마음을 알아보기를. 내 자아는 부서지고 깨져있고 건강하지 못했다. 아니, 병들어 있었다. 사랑만이 내 병을 치유해 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로맨스는 신앙이 돼버린다. 내가 꿈꾼 사랑은 신과의 합일처럼 완전무결했다. 내 부족함을 항상 포용하고 내 두려움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보고 언제나 용서하는 사랑이었다.      


불행히도 이런 사랑을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한 대상은 인간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더 이상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하면서, 동시에 나는 사랑이라는 마음을 아주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으로 휘둘렀다. 상대의 뜻을 왜곡시키고 급기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야 만다. 그런 이별은 사랑의 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상실로 이어졌다. 상대로 인해 비대해졌던 내 자아는 상대가 떠나는 순간 쪼그라들었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못난 사람으로 만들고야 만다.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건 살아갈 의미를 잃는 일과 같았다. 허무의 세계의 나의 유일한 동아줄. 불나방처럼 본능처럼 다시 사랑했다.      


그때 나에겐 여러 다짐의 순간이 있었다. 연애가 없어도, 남자친구가 없어도, 나와 더 잘 지내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립의 순간들. 언젠가 남자친구에게 크게 상심해서 혼자 서점에서 책을 사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슬픈 내용 때문에 울었는지, 내 마음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눈물을 끄윽, 삼키고 책의 귀퉁이에다 다짐을 적었다.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니 이렇게 홀로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한 가지 순간이 더 있었다. 이번에도 책이었다. 에스터 페렐의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불륜의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외도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분석한다. 저자는 심리학자 로버트 존스의 말을 빌려와 현대의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비판한다. “낭만적 사랑은 서구 사회에 단 하나 남은 유일한 에너지”라며 “우리 문화에서 낭만적 사랑이 종교를 대체했다. 이제 남녀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영역 안에서 의미와 초월성, 완전무결함, 황홀함을 찾는다”라고 지적한다.      


이 구절은 앞서 나와 대화를 나눈 후배가 깨달음을 얻고 안도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줬다. 내가 전혀 몰랐던 사실, 내 마음이 그대로 적힌 구절들을 보자 스스로 꽁꽁 싸맨 고립이 깨진 기분이었다. 절대적 기준 체계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은 사랑과 결혼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커플은 절대적 사랑을 오직 유일무이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찾기 시작했다. 오히려 과거의 귀족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분리되어 있었다. 결혼은 집안의 비즈니스이자 거래였고 따로 애인을 두며 짜릿한 연애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 사랑에 빠진 남녀는 오직 두 사람 안에서 모든 걸 충족해야 한다. 경제적인 충족뿐만 아니라 감정적 충족까지. 사랑의 신화는 결혼반지로 두 사람을 묶어두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설레어야 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요구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에 절대성을 믿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저자는 현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더 높아졌지만 정체성과 자존감을 낭만적 사랑에 저당 잡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세네갈 친구를 예로 든다.  

“세네갈 여성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남편에게 배신당해 본 사람은 여럿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상실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도 잠 못 드는 밤과 질투, 멈추지 않는 눈물, 폭발하는 분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이 보기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원래 남자들이 다 그렇기”때문이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신념은 세네갈에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 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이들의 자아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사랑을 꽁꽁 싸맨 과대포장을 벗겨 내자, 그제야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됐다. 상대방도 나처럼 나약하고 외롭고 때론 어긋난 마음을 갖고 있음을, 그래서 내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고 싶었던 마음은 반쪽짜리 사랑이었다. 나 역시 당신을 구원해야 했다. 당신의 허무를 응시하고, 당신의 욕망을 바라봐야 한다. 사랑을 여전히 모르는 사람도, 이제야 조금 사랑을 알 것 같은 사람도, 그저 자신에게 맞는 사랑을 겨우 찾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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