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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un 23. 2024

이별의 무덤에 나를 묻다

그리고 애도하는 법

+ 이 글 첫 문단에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이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은 내겐 정말 특별했다. 그동안 내가 이별을 감당한 방식을 하나의 정확한 이미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무덤. 서래의 무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서래와 해준의 마음은 이렇게 어긋났다. 서래는 바닷가에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다. 해가 지고 밀물이 들어온다. 물은 서래가 판 무덤을 천천히 흙으로 덮는다. 뒤늦게 도착한 해준이 서래를 찾기 위해 서성이지만, 무덤은 이미 물에 잠겨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때 내 심장에 박힌 무덤들이 떠올랐다. 이별은 한 세계가 무너지고 그 세계에 속해있던 나를 묻는 일로 여겼다. 영화가 끝나고 다양한 감정이 몰려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남몰래 품고 살았던 이별의 무덤을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아 창피했지만,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서투르게 나를 묻어 버리느라 이별을, 그 시절의 나를, 제대로 애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덤에 묻어둔 그때의 내 모습이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깨진 감정이 한 번 들고 일어나 진흙탕처럼 혼탁해질 뿐이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좋은 이별'이란 말을 여전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좀 더 젠틀한 방식으로 헤어지는 일일까. 어떤 방식으로 헤어지든 이별 후 비참함과 허무함은 똑같았다. 아니면, 서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일까. 하지만 그건 역으로 당신을 오해했다는 슬픈 고백.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의 환희와 기쁨은 거짓이 되고, 약속의 말은 올가미가 된다. 그래, 사랑이라는 걸 찰나의 감정으로 치부하고,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일. 내 사랑이 고작 종지만하다는 걸 시인하는 일. 당신을 더는 포용하지 못하겠다는 포기의 선언. 아무리 좋은 핑계를 대도 결국 너랑은 안 되겠다는 말, 아니, 바로 “너라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 하지만 이별의 순간까지 이런 자신의 찌질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결국 이별은 서로에게 거대한 미스테리로 남는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에게 이별은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는 것처럼.      


하나 더 남는다. 내 자아가 부정당했다는 사실. 이 명백한 사실은 우리를 허무로 미끄러트린다. 이별은 단순히 사랑이 끝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세계에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선언이다. 합일의 달콤함은 순간의 몽상이 되고, 떨어져 나간 자아는 붕괴된다. 사랑에 대한 신념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 어떤 한계에서 밀어지고 내쳐지고 받아들여지면서 회복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될 때, 분명 관계는 끝나야 한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는 것,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도 유아기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다.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마음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만드는 건 어쩐지 가식적이다. 서로의 끝, 비열함, 기만, 거짓, 속임수, 이기심은 간파하고 간파당하다.      


이별 후 남은 일은 애도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부 주고 이별을 하고 나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별과 상실은 죽음과 닮아있었다. 나는 너무 사랑했던 대상을 차마 파괴할 수 없어 차라리 내가 훼손되는 걸 선택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이별 후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실종된 거라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실종자는 나였다. 내 존재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태양 아래 물방울처럼 자국 하나 없이 세상에서 증발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를 증오하고 감금하고 지워버린다. 이런 마음을 떠올리면 스스로 가여웠지만, 문제는, 내가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애도의 목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해 이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면 멜랑콜리, 우울이 온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나는 항상 애도에 실패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상실은 떼어낼 수 없었으니까. 그것은 명백히 나였으니까.      


다행히 또 다른 철학자인 데리다의 말에 기대본다. 그는 애도를 다르게 말한다. 그건 인간의 숙명이자 평생의 숙제라고. 상실의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는 게 애도의 성공이고, 슬픔을 멈추는 것은 애도의 실패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완전히 극복하고 털어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 시절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떼어버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이제 없다. 그 깊은 허무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나만이 있을 뿐이다. 이별과 상실을 끌어안고 애도를 놓지 못해도,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도 살아진다고. 과거의 무덤 앞에서 나를 추억하며 꽃을 놓고 잡초를 뽑아주리라. 그리고 노래 한 곡절을 부른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에 메어와도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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