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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Oct 21. 2024

스스로 피에타가 되면

론다니니 피에타를 보며 깨달은 진정한 구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오랫동안 구원의 상징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다. 이 조각상은 청년 미켈란젤로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나는 마리아가 죽어가는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던 때. 모른다는 것도 모르던 때. 내 불안한 감정의 실체를 모른 채 ‘그저 나 왜 이렇게 잘 되는 일이 없을까’ 라는 문장이 한숨처럼 나오던 때. 나는 쓰러진 예수의 모습에서 정확하게 ‘나’를 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나를 품어주길. 나를 감싸줄 마리아를 찾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론다니니 피에타, 그가 죽기 일주일 전까지 손에 쥐고 다듬었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조각은 이상하고 낯설었다. 마치 미완성처럼 보였다. 마리아는 예수를 부드럽게 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듯했다. 그녀 자신조차도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예수를 일으키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조각의 형태는 불완전했고, 손과 다리의 윤곽은 흐릿했다. 마리아의 얼굴과 예수의 상반신은 대리석 속에 반쯤 갇힌 듯 아직 형상을 다 드러내지 못한 상태였다. 대리석의 거친 면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전체적으로 조각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 말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이 자체로 완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나는 이 조각을 오래 응시하다가 문득, 마리아와 예수가 한 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몸은 서로 얽혀 있었고, 뭉툭한 이목구비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은 내가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몸짓과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구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직 구원을 받기만을 바랬지, 내가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마리아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왼쪽) 바티칸 피에타 (오른쪽) 론다니니 피에타 (출처 : 위키피디아)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떤 모습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때론 이 불만은 더 탁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바뀌곤 했다. 그 모든 욕망이 그저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왜곡된 욕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어느새 그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기대했던 무엇도 이루지 못할 거라는 두려운 진실이 나를 덮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 백기를 들고 죽음 같은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남몰래 수치심을 억눌렀다. 이렇게 비참한 마음으로 도저히 잘 살 방법이 없다는 불면의 밤 뒤엔 거짓말처럼 아침의 태양이 떴다. 그러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라는 유치한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하루를 살아갔다, 삶을 바꾸려는 특별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러다 나 스스로에게 “너는 대체 왜 사니?”라고 따지고 드는 날이면, 나는 죽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나의 믿음이 위조된 진실이라면?     


그럼에도 내가 유일하게 놓지 않은 것은 명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었다. 나에게 사랑은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이었다. 그 시작은 감각에 집중하는 일부터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미역국 먹고 기분 좋아졌네. 힘겹게 써내려간 글을 완성하고 나니 상쾌하네. 산들바람이 부는 10월의 하늘은 축복이네. 매끈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노트와 잘 굴러가는 펜에 있으니까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네. 이 작가는, 이 책은 어쩜 이렇게 탁월한 걸까.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은 모두 내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들을 수집해 글로 옮긴다. 글쓰기는 부조리와 허무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겠다는 나의 사투였다.      


글쓰기는 마치 대리석에서 형상을 찾아 불필요한 부분을 쳐내는 미켈란젤로의 작업과도 비슷했다. 나는 글을 쓰며 내 감정과 생각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불필요한 단어들을 덜어내고, 올바른 언어가 내게 주는 자유를 느꼈다. 내가 만든 문장이 나에게 피에타가 되는 기적. 내가 나를 끌어안자, 내가 맹세했던 삶에 대한 사랑은 더 이상 거짓이 아닌, 명확한 실체라는 걸 알게 됐다.     


미켈란젤로가 마지막까지 조각을 놓지 않았듯이, 나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더듬어 작품을 만든 미켈란젤로는 유언으로 ‘Ancora Imparo’ 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백전노장이 그때까지 조각을 배웠을까 싶다. 어쩌면 허무를, 구원을, 사랑을, 인생을 배우고 있다는 말 아니었을까. 나의 구원은 그래서 완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다. 마지막 순간 그 피에타는 여전히 미완성일지라도, 그 형상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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