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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ul 28. 2024

사랑이란 감정이 아닌 지성이다

보부아르와 김향안

사랑은 왜 이렇게 허무한 걸까. 지금보다 어렸던 나는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 이 문제를 고민했다. 숱한 불면과 퉁퉁 불어 터진 눈과 먹먹한 슬픔을 품고 살아가던 어느 날. 차분한 새벽빛이 스미는 방 안에서 내가 사랑을, 아니,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려 하는 마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마음을 내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절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을 직면한다. 배를 맞대고 누워 나와 함께 뛰었던 그의 심장이 저만치 뒷걸음질 친다. 그 사이는 까마득한 허공이 절벽처럼 솟구친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내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것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매번 마음을 꺾는 일. 한 번 꺾인 마음은 접은 종이처럼 그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자국은 내가 너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커플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였다. 20세기 초 파리의 지성이자 영원한 연인. 소르본 대학 철학 교수자격시험에 나란히 1, 2등을 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대학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의 지성을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적 연애를 하지 않았다. 2년씩 계약을 갱신하기로 하고 연인관계를 시작했고, 평생 그 계약을 유지한다. 계약의 내용이 당대에도 파격적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날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대신 서로에게 비밀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사랑할 권리를 인정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이별 후 평생 보지 못하는 것보다 영원한 소울메이트로 남기 위해 이 방법을 택한 것 같다. 사실, 그들만의 사랑법이 처음부터 완성형은 아니다. 그들의 지난한 연애사를 다룬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천국에서 지옥까지>에는 다른 여자에 빠진 사트르트의 지나치게 솔직한 감정 표현 때문에 보부아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다른 연애에 빠진 보부아르를 사르트르가 얼마나 참을성 있게 기다렸는지가 나온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는 대화 때문이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를 완벽한 대화상대라고 말하고, 보부아르는 지식의 훌륭한 반려자라고 평했다. 이들은 척박하고 어두운 지상에서 서로의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를 나눴다.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한계를 느껴야 했던 보부아르에게 사르트르와의 대화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특별한 순간이었으리라. 그건 사르트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는 글을 쓰면 보부아르의 피드백을 받기를 기다렸다. 내가 어떤 이야기든 할 사람이 있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외롭지 않은 일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 일부러 웃기려고 하지 않고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 사람은 이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내가 평생 꿈꾸는 사랑의 형태를 명확하게 만들어줬다. 소유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는 관계. 내 인생의 이야기가 네 인생의 이야기가 되는 삶. 세상을 향한 그의 호기심이 온전히 나의 호기심이 되는 지적인 대화. 때론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비판, 아이 같은 칭얼거림, 비이성적인 판단, 불안전한 감정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자유로워지려면, 상대방도 내 앞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리낌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바로 되는 건 아니었다. 완벽한 관계라는 건 환상이니까. 나는 지금의 반려자와 함께 서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계속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롤모델 커플과 다르게 나는 소울메이트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이 됐다. 이 일상이 서로의 개별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자유를 훼손하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이 있었다. 새로운 본보기가 필요하던 차.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에서 새로운 커플을 발견했다. 김환기와 김향안. 달항아리와 점묘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으로만 알고 있었던 김환기 화가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을 함께 한 향안이 함께였다. 변동림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남편의 아명(兒名)을 받고 새롭게 태어날 용기를 가진 여자. 내 그림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세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전쟁통에 피난을 가면서도 프랑스어책을 놓지 않은 여자. 남편보다 먼저 프랑스로 떠나 그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작업실과 전시회 준비를 혼자 해낸 여자.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썼지만 남편을 위해 미술 공부를 해 미술평론까지 쓰게 된 여자. 예술의 세계에서 빠져 사는 남편을 위해 일상을 꾸리고 통역을 맡아온 여자. 환기가 목디스크 수술 후 회복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작품을 전 세계에 전시하고 재단과 미술관을 설립한 여자. 사랑을 동력으로 불꽃처럼 살아온 김향안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이란 지성이다.”          


사랑으로 발견한 상대를 지성으로 성장시킨 이야기는 내 뼈에 새겨놓고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내조라는 말보다 ‘협력한다’라고 표현한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그의 꿈과 내 꿈을 포개 함께 꿈을 꾸는 현명한 사랑이다. 이 둘은 오직 서로에게만 충실했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속박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깊이가 너무 깊어 사랑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의 사랑의 들여다볼수록 나는 한 가지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런 오래가는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내던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담대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이런 관계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온전히 혼자 남아야 한다. 아니, 반쪽만 남는 것이다. 거의 하나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실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갈 동력을 잃기 쉽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향안은 역설적이게도 떠난 남편 때문에 그 상실을 극복할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한 사람이 남기고 간 일상을 짊어지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사랑을 생의 동력으로 삼은 사람에게 삶의 유일한 이유였으리라. 나는 곧 그의 연장(延長)이자 그의 생명이 된다.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향안의 내면은 그렇게 단단하게 성장했다.           


영원한 사랑은 결국 죽음 앞에서 무용하게 흔들린다. 우리는 다가올 긴 이별을 유예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필멸자(必滅子)일 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 뒤에도 사랑이 남고, 그 사랑이 한 사람을 이끈다면 그 사랑은 ‘영원성’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빋는 상대론자지만 사랑에서만은 예외다. 보부아르와 김향안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이 죽음을 초월해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랑은 무신론자인 나의 유일한 믿음이자, 종교다.

    


참고도서 : 헤이젤 로울리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천국에서 지옥까지>,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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