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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an 13. 2019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20대의 나는 중학생 아이들을 앉혀놓고 중간고사 시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시험범위는 한국현대문학사였고 아이들은 연도별 문학사조와 작가를 외우느라 지쳐있었다. 1940년대로 넘어가고 윤동주 시인이 나올 때쯤이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한때 아름답다고 여겼던 시구는 더 이상 의미 없는 문장으로 느껴졌다. 그때였을까. 한 여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꿈이 뭐에요?”

 “네가 이번 국어 시험 백 점 맞는 게 꿈인지.”


 수업에 싫증 난 아이가 하는 잡답이려니 하고 대충 넘기려고 했는데 뒤이은 아이의 말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거 말고요, 진짜 되고 싶은 거요. 윤동주는 별이 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전 말이죠,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할머니? 왜 할머니야?”

 “이대로 시간을 점프하고 싶거든요. 그럼 시험공부 안 해도 되고, 대학 가려고 기를 쓰고 입시준비 안 해도 되고, 취직 하려고 스펙 쌓는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을 거잖아요. 이대로 바로 할머니가 되면 TV 드라마 보면서 뜨개질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잖아요.”

 “아…” 


 이 아이는 벌써 알아버린 것이다. 자신의 청춘 대부분이 시험과 경쟁으로 뒤범벅이 될 거라는 걸. 할머니가 되고 싶은 꿈에는 그 모든 걸 피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린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힘들었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시험과 경쟁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교사 임용고시에서 몇 차례 고배를 마시고 궁여지책으로 작은 보습학원에 취직한 신세였다. 오른손 인대가 들어날 정도로 공부했지만 계속 낙방이었다. 계속 떨어지는 시험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도피하듯 취직했다. 나야말로 시험 패배자였는데 아이들을 앞에 앉혀놓고 시험을 잘 봐야 한다고,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되는 거라며 아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 애를 마음 한 편에 담아둔 건 빛나는 청춘을 가질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한 부끄러운 마음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패배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제 내 삶을 꾸려갈 용기를 갖게 된 지금, 나는 그 녀석에게 다시 말해주고 싶다. 


 할머니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건 그 시간을 다 품고 견뎌왔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혹독한 폭풍우를 견뎌냈기 때문에 할머니의 시간이 그렇게 고요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라고. 늙는 것과 나이 드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라고. 할머니가 된다는 건, 그러니까 나이 든다는 건, 쓰라린 시간의 나이테를 새기며 버티다가 그 자리에서 다른 이를 조용히 품을 수 있는 그늘을 가지는 것이라고. 


 혹시 지금 네 앞이 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다면 그 때 같이 외웠던 윤동주 시인의 시 구절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구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흙으로 덮으며 하염없이 부끄러운 마음을 토로했던 시인은 처음엔 없었던 마지막 구절을 추가했다지.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간이 흐르면 나의 청춘이, 그리고 너의 청춘이 사실은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르지. 그땐 우린 꽤 멋진 할머니가 되어 있지 않을까. 



* 위 글은 좋은생각 <제3회청년이야기대상> 수상작이고 이번 2월호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인쇄되어 나온 글을 보니 이 글을 썼을 때 마음이 다시 떠올라 여기에도 같이 공유합니다. 요새는 브런치 같은 온라인매체가 있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소소한 삶의 반짝이는 사연을 좋은생각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추억이 많은 잡지인데 이렇게 상까지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표지 사진 freepik.com @ Designed by rawpix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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