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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Aug 30. 2020

모르겠어

제대로 쓰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는 말


모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탈이고 너무 과해도 탈이다. 심지어 정말 몰랐을 때 써도 탈이다.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질문하라고 한 것처럼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사유하는 인간의 진실한 태도지만, 모르겠다가 이렇게 순수하게 제대로 쓰이는 걸 보지 못한 거 같다.      


사무실에 신입이 들어와 내가 업무를 가르쳤던 일이 있다. 어리고 똑똑한 아이였다. 자기 손으로 직접 써서 업무 노트를 만들 정도로 일에 열정도 있었는데, 그 표지에 자기 이름을 써놓고 그림을 그려 예쁘게 꾸며 놓은 게 어린 티가 팍팍 났다. (그리고 우리 언니들은 그걸 신나게 놀렸다)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 얼마나 설레고 떨렸을까. 뭐든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예뻤지만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곧 그 실체를 알게 됐다.     


그 얘는 모르겠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뭔가를 가르쳐주면 다 ‘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다시 물어봤다. “너 진짜 이해했어?” “네.” “그럼 다시 설명해봐.” 그러자 말을 못 하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00아, 있잖아, 누가 뭐라고 지시하거나 물어보면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할 필요 없어.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물어도 돼.”     


그리고 내가 다하지 못한 말. 

‘그렇지 않으면 네가 피 볼 일이 생길지도 몰라. 알겠다고 해놓고 이해하지 못해 혼자 속앓이를 하는 걸로만 끝나지 않아. 상대방은 알겠다고 대답한 네 말만 믿고 있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한 네 말과 행동에 의아해하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 너를 믿지 못하게 될 거야.’     


차라리 업무상 관계에서는 솔직한 편이 낫다. 상대방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시 확인하는 일,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다시 설명해 달라는 용기, 그렇게 되묻는다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텐데, 그 애는 다시 묻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애가 두려웠던 건 ‘왜 한 번에 못 알아들어?’ ‘그것도 몰라?’ 이런 무시와 비난일까.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그 순간의 무성의가 드러나고 만다. 차라리 그 순간 모르겠다고 말해버리는 게 잠깐 창피할지는 몰라도 그게 서로의 오해를 줄이는 길이다.     


반대로 모른다를 너무 남발하는 경우.

남편이 예전 직장에서 만났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남편이 회사 일을 그만두면서 후임자로 온 사람이었는데 업무를 아무리 가르쳐도 다음날 도로아미타불이 된다고 했다. 분명 그 순간에는 이해했다고 한다. “진짜로 이해 못한 거 아냐?” 남편의 설명에 내가 끼어든다. 남편이 부정했다. “아니야, 그 순간에는 정말 이해했다니까.”      


문제는 다음날이 되면 지우개가 머릿속을 지운 것처럼 새하얗게 까먹고 똑같은 걸 다시 물어보더라는 것이다. 보름을 그 짓을 했는데도 그 사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내용을 어깨너머로 듣던 다른 직원이 그 업무 처리 내용을 이해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똑같은 업무 문의로 몇 차례나 전화가 왔고 몇 번 받아주다가 결국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그 내용을 엄청 열심히 노트까지 해놨다고 한다. 얘기를 다 듣고 그 사람의 증상을 고민해봤다. 그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은 진짜였을까. 그 정도 반복했으면 정말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노트 필기까지 해놨다는데. 이건 기억력 문제라니 보다 누가 옆에서 봐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일처리를 할 수 없는 불안 증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      


근데 이런 사람들 생각해보니 나도 은근 많이 만났다. 그들의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하기 싫다는 말의 좀 더 순화된 표현일 뿐. 모르겠다는 것도 적당히 몰라야지 저 정도로 반복하면 그냥 알겠다는 의지가 없는 거 아닌가 싶다. 그 무책임과 무능력이 범벅되어 있는 그 말은 주변 사람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그 정도 했으면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데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너무 당당하다. 마치 청문회장의 예의 그 뻔뻔한 대답 같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쓰임을 정말 모르겠는 게 진짜 모르겠는 순간을 만났을 때 모르겠다고 말해도 엄청난 질책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나이가 되어, 그 자리에 앉아, 그 일을 하면서,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따지고 들면 내가 몰랐다는 사실이 죄처럼 느껴져 얼굴이 붉어진다. 그럴 때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때가 그립다. 내 옆자리 직원의 어린 딸이 곤충을 기를 거라며 밖에서 곤충 친구를 잡아왔다고 자랑했는데, 막상 열어보니 그것은!!!! ‘바퀴벌레’였다고 한다. 당황한 엄마 얼굴을 보며 뭔가 잘못인지 진정 모르는 그 순수함, 곤충에 대한 아무런 편견도 없는 그 천진난만함. “이게 무슨 벌레인지 몰랐어?” “응, 몰랐어. 이게 뭐야?”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모르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었고 듣는 사람도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바퀴벌레를 기르겠다고 집에 들고 왔던 그 아이는 지금은 조금 더 자라서 이제 바퀴벌레도 혐오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쥐는 더 혐오하는 아이가 됐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몰랐다’라는 단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걸 모른 채 놔두고 적당히 아는 척만 하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닐지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세상은 아직도 모르는 건 천지일 텐데, 점점 몰랐다는 말을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질까. 진짜 몰랐던,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을 떠나지 않아서일까. 진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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