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원인 모를 편두통을 달고 살면서
“인간은 고통을 참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내 마음 속 이 문장에서 고통은 마음의 고통인 날도 있지만 물리적인 고통인 날이 더 많다. 마음이 무너질 만큼 괴로운 일이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이 문장이 더 날카롭게 나를 파고드는 때는 실제적인 통증, 몸이 아플 때다. 어려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편두통을 앓았고 오늘도 시달렸다. 진통제와 휴식으로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는 순간, 여전히 목 뒤쪽에 남아있는 미진한 통증을 더듬으면서, 나는 또 하나의 문장을 떠올린다.
“그래도 오늘을 버텨냈구나.”
며칠 전 유튜브에서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의 영상을 봤다. 이 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의 여러 부위 신경증적 통증을 느끼는데 그 통증의 강도가 너무 세서 피부에 바람만 스쳐도 고통을 느낀다는, 난치 희귀병이다. 지금으로선 마약류에 진통제로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김경수씨는 디그니타스의 안락사 승인을 받고 조금 안도했다고 차분하게 고백한다. 어려운 절차를 거쳐 승인이 났을 때 마지막 보험을 든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고 견디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내 몸이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그나마 품위있게 자신의 삶을 정리할 하나의 방법을 갖게 된 것 아니겠냐고. 고통 속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을 처절하게 생각했을 사람의 숙고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럼에도 생계와 치료비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일을 하며 생의 불꽃을 밝히고 있는 모습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불현 듯 니체가 떠올랐다. 니체는 가장 꽃처럼 피어날 20대부터 병에 시달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하면서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고 그 영향으로 평생 쇠약 증세에 시달렸다고 한다. 24살 어린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됐지만 34살 되던 해에 몸이 아파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로부터 10년간 여러 나라를 돌며 요양생활을 하며 저서를 남긴다. 그 10년 동안 극심한 두통과 시력 약화, 발작과 마비 증상은 더 심해진다. 그렇게 통증 속에 살았던 그는 질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질병은 우리를 서서히 자유롭게 만든다. 질병은 나에게 모든 단절, 모든 폭력적이고 불쾌한 과정을 허용해준다. 질병은 그와 동시에 내게 모든 습관을 뒤엎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준다.”
질병은 일상을 끊어낸다. 일단 무기력해진다. 내 의지는 이 무기력에 덮어진다. 그날 해야 했던 일, 하고 싶었던 일은 모두 없던 일이 된다.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오직 몸이 통증을 견디고 다시 정상 컨디션을 찾는 일만이 ‘오늘의 할 일’이 된다. 하지만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약이 몸에서 작용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뒤척이면서 통증을 참는다. 약 부작용인지 속이 뒤집히고 메스껍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무기력의 밑바닥에서. 그러니까 약해져서 꼼짝못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사유하기 시작한다. 생이란 무엇인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 나약한 몸으로 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고통을 참는 시간은 내 관점을 변화시킨다. 사소한 것이 중요해진다. 밥을 먹고 잘 소화시키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머리가 울리지 않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서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상쾌한 일인지 알게 된다. 아프지 않은 상태로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어 내 정신은 다시 활활 타오른다.
“지금 이토록 오래 지속되어 있는 질병은 내 안에 존재하는 삶을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나의 철학은 살고자 하는 의지, 건강에 대한 의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운명을 굴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고통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그것과 대결해서 자신을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가 평생 고통과 맞서 싸운 방법이었다.
통증이 몸을 뒤엎는 날이면, 이렇게 자주 아프니 차라리 죽으면 아플 거 같지 않아 좋을 거 같다는 염세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 진통제로 통증이 가라앉으면, 오늘을 버텨낸 내 몸과 정신을 위로하게 된다. 오늘을 견뎌냈다는 것 온 몸에 혈액에 막혀 있다가 다시 제대로 도는 짜릿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살아보겠다고 컨디션 조절을 하고, 고통의 순간 마음이 무너져 너무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음 수련을 한다. 그렇게 아프지 않은 몸을 기대하고 살지만 원인 모를 통증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생의 의지는 바닥으로 내팽겨쳐지고 무기력에 잠식해 있다가 고통이 나아지면 힘겹게 다시 돌아온 후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고통에 대처하는 내 방식이다. 모두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통을 참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 니체의 말 인용부분 : 발타자르 토마스 <우울한 날엔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