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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넘은 중년 여성을 왜 IT회사 면접에 부르셨나요?

by 피넛버터

다시 9-6의 시간 노예로 돌아가, 웃음 스티커를 얼굴에 매일 붙이고, 객관적이라 주장하는 성과 지표로 끊임없이 서로를 평가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은 당근에서 일자리를 구한다고들 하던데, 아이들 물건 팔때 사용하던 당근 앱을 열어 '동네 생활'이라고 적힌 메뉴를 눌러본다. 우리 가족이 주말이면 가끔 가는 커다랑 대형 베이커리에서 샌드위치 만드는 사람을 채용한단다. 맛있는 빵을 파는 가게에서 일한다니 우리 둘째 동화책에 나오는 숲속 쿠키가게의 엄마 토끼 같아 보인다. 흥미로워 보이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역이라 도무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 20년 지기 취미인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래, 영어 학원! 사람인에서 집과 가까운 학원을 필터링해서 나온 곳에 이력서를 돌렸다. 학원에서 아이들 영어를 가르쳐본 게 이미 25년 전이다. 그래도 첫째가 초등 5학년이 될 때까지 집에서 엄마표 영어를 해오면서 익힌 감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군데 정도 지원한 것 같다. 그 중 딱 한 군데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board-64269_1280.jpg 두근두근 영어 강사?



약속을 잡고 찾아간 곳은 원어민 강사 두 명을 포함해 총 다섯 명 정도의 강사가 있는 초등 대상 영어 학원이었다. 그곳에서 나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영어 학원 원장을 만났다 (그분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요즘 젊은 학원 강사들이 말도 없이 그만두거나 심지어 면접에 오기로 하고 펑크 내는 경우도 많아서 소위 '아줌마' 선생님을 뽑는다고 한다.


내가 아줌마 그룹에 속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푸근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면접에 임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말했다. '얘들아 엄마,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 하게 될 수도 있어!". 아들의 표정이 의아하다. '겨우 엄마 정도가 영어 선생님을 한다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음날 그녀로부터 다른 선생님을 채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 집 아들의 직감이 맞았나 보다. 그렇게 서너 달이 흘렀다. 그 뒤로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영어 학원은 더 이상 없었다. 학원이 아닌 다른 파트타임 일자리도 둘러봤지만, 시급이 너무 적다. 아무리 정규직 형태의 풀타임 회사가 아니더라도 일터라는 곳은 결국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피곤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을 텐데 이 돈을 받고 가자니 뭔가 아니다 싶다.


생활비는 계속 부족해서 저축해 놓은 돈을 꺼내 쓰고 있던 중,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혹시 재택도 가끔 가능하고 예전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살벌한 경쟁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직장은 없나 하는 기대가 피어오른다. 도피처처럼 향했던 대학원이지만 혹시 이와 비슷한 전공이라도 살릴 수 있지나 않을까?


결국 다시는 방문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링크드인(Linkein)!. 링크드인은 국내의 사람인이나 원티드처럼 채용 사이트의 일종인데, 사실 그 규모는 우리나라의 채용사이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채용 및 커리어 소셜네트워크다. 나의 지난번 회사도 여기서 구했었고 직장에서 커리어 관리 좀 한다는 대다수의 특히 외국계 사람들은 링크드인에서 인맥관리를 한다.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집어넣으니 AI님이 친절히 필터링해 준 채용 공고가 여럿 뜬다. 회사 이름은 생소했지만 job description이 눈에 띄는 한 회사가 있다. 크지도 적지도 않은 규모의 국내 IT 스타트업이다. 업무도 내가 하던 분야와 비슷한 것 같고, 이런저런 복지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흠 여기라면 그래도 아이들 키우며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학원 강사용 이력서 말고 묵혀두었던 일반 직장인용 이력서를 다시 찾아내 여기저기 다듬기 시작했다. 경력이 10년 이상 넘어가면 사실 내용이 꽤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세히 쓰다 보면 이력서가 세장씩 넘어가기 십상이다. 경력이 짧아보이게 최대한 간결하게 줄이고 또 줄여본다. 아, 5년만 젊어도 좋으련만. 50이 넘으면 40대만 되어도 좋겠다고 바라겠지? 그래 부질없다 그런 I wish I could 형의 가정법 따위.


마흔 중반에 그것도 중간중간 육아 때문에, 대학원 공부 때문에, 띄엄띄엄 일해온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이력서에 누가 관심이나 갖을까. 다시 풀타임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절반 그래도 돈은 벌면서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 절반이라, 이력서를 내고도 큰 기대도 없이 한참을 평소 내 일정대로 생활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이메일로 서류 전형 합격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와중에 , 단기 계약직이지만 집에서 가까워 보여서 무심코 지원했던 한 회사에서도 거의 같은 날에 연락이 왔다.


begin-4113375_1280.jpg 당시 이런 느낌?!?


오 마흔 중반, 아직 녹슬지 않았어!


단기 계약직 자리는 집에서 가까워서 차로 출퇴근 할 수 있을 것 같고, IT 스타트업 회사는 지하철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단기 계약직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면접을 가겠노라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약속 당일 아침, 면접 담당자가 전화가 왔다. 채용공고에 정확히 몇 달 계약이라는 명시를 안 한 것 같은데 3개월 밖에 안 되는 자리인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어본다. 사실 이미 화장도 하고 옷도 입은 상황이라 그냥 가도 되었는데,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처음 이력서를 먼저 낸 IT 회사의 1차 면접이 왠지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3개월이라 사실 탐탁치않기도 했고), 아 그러면 그냥 면접은 취소했으면 한다고 답해드렸다.


결국 처음 지원한 IT 회사만 남았다. 내가 지원한 서류전형 이후 면접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차: 실무진 대화 면접

2차: 프레젠테이션 실무 면접

3차: 운영진 면접


먼저,


1차 실무진 면접:

면접 간다고 옷을 새로 사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는 징크스도 있다. 물론 경력 단절의 공백이 5년 이상으로 길고 평소 운동복만 애정해 왔던 엄마들이라면 옷 좀 장만하는 게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냥 집에 있던 깔끔한 옷 대충 입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하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대충 예상해 보면서 찾아간 회사는 지하철역에서 3분 거리에 있었고, 커다란 건물의 여러 층을 쓰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면 전화하라며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거니 앳되보이는 여자 직원이 나와서 나를 대기실로 안내해 준다. 그리고 회사 로고가 둘러진 생수도 손에 쥐어 준다. 면접이라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투부터 눈빛 하나하나까지 평가받으러 가는 자리라 늘 긴장으로 입에 침이 마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생수를 미리 대기실에서 주는 건 참 배려가 돋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면접 시간이 되어 안내된 회의실로 들어가니, 두 명의 남자 직원이 앉아있다. 역시나 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 둘의 나이를 내심 가늠해 보니 한 명은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어려 보이고, 다른 한 명은 백퍼 많아야 30대 후반처럼 보인다.


그들이 묻는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했다. 이 포지션이 어떤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냐, 이전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어떤 걸 했냐, 해외 생활을 어디서 했었냐, 취미가 뭐냐, 집은 어디냐 등등 이런 질문이었다. 나에게 회사에 대한 질문이 있냐고 하길래 미리 준비해 간 회사 업무와 관련된 질문을 몇 가지 했다. 하지만, 실제 내가 그들에게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은 "곧 50을 바라볼 늙은 나를 왜 이런 젊은이들 가득한 IT회사 면접에 부르셨나요?" 였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2차 프레젠테이션 면접:


1차 면접을 통과했으니 2차 면접 준비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으음? 요즘 IT 업계에 사람이 많이 부족한가? 2차 면접은 PPT 발표 형식으로, 회사가 주는 데이터베이스 소스를 바탕으로 시계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시각화 플랫폼을 만들고, 해당 시각화 플랫폼의 사용 방법을 교육하는 형식으로 해달라고 한다.


준비에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졌다. 처음 보는 생소한 과제에 구글서치와 유튜브를 통해 매일 공부해 댔다.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나면 노트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그것만 공부했다. 사실 간단한 웹개발 경험이나 기본적인 IT 지식이야 있었지만 실제 실무에서 활용해 본 적이 없기에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준비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간간히 들었다. 아 이건 감히 내가 할 수준의 PPT가 아니구나. 그런데 계속하다 보니 또 방법이 보인다. 그렇게 겨우겨우 짜 맞추다시피 겨우 완성하고 파일을 인사팀에 제출했다.


드디어 2차 면접날. 그런데 이 날 이동 시간 계산을 잘 못했는지, 집 현관문을 나서고 보니 지각할 각이다. 구두를 신은 발이 아파왔지만 뛰다시피 걸어서 지하철 입구로 서둘러 내려갔다. 회사 근처 지하철역에 밖으로 나오고 나서 정말 미친 듯이 바람처럼 달려서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정확히 면접 예정 시각이었던 오후 2시 00분이다. 마침 회사 직원이 건 전화가 울린다. "안녕하세요 지원자님, 어디신가요?"


나는 하나도 숨차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아, "아, 저 회사 로비에 있습니다"라고 말함과 동시에 재빠르게 로비로 몸을 던졌다. 면접 대기실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회의실로 곧장 안내되어 준비한 PPT 발표를 했다. 지각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노트북의 마우스 패드 위를 움직이는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PPT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면접이라는 건 언제나 싫다.


3차 임원진 면접:

그렇다, 2차 면접도 합격했다. 사실 2차 PPT 면접은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초반에 너무 떨기도 했고 내 PPT 자료가 너무 엔지니어스럽다며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면접을 보러 오라 한다. 뭘까? 사실 최종 합격한다고 해도 갈까 말까 고민은 되겠지만, 일단 최선은 다하자고 결심했다.


1, 2차 때 뵈었던 두 분이 다시 나오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낯선 남성 네 분이 앉아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그중 한 분은 많이 보던 분이다. 회사 이름을 서치하면 늘 신문 기사에 얼굴이 등장하는 그분, 바로 회사 대표였다. 팀장급도 아닌 나 같은 일개 사원을 뽑는데 회사 대표도 면접을 하는구나. 이 회사 대표는 참으로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라, 너의 포지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 이 회사를 지원한 이유가 뭐냐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보니 15분이 지났다. 임원진들이라 바쁘니 간단하게 끝내나 보다. 다행이다.


이렇게 모든 면접은 끝났다.

결과는 최종합격.


이제 룰루랄라 행복의 시간이냐고? 그렇지 않다. 그 회사는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테고, 이제는 내가 선택할 차례다. 그토록 싫어하며 떠났던 회사생활을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려니 무척이나 두려웠다. 집에서 좋아하는 책이나 읽으며, 1인 사업을 해보겠다며 혼자 노트북으로 끄적거리며 내 세계 안에서 행복했던 (그리고 가난했던) 여유와 이별해야 한다.


아무리 재택을 가끔 지원하는 회사라지만 이제 하교 후에 혼자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첫째가 눈에 밟혔고, 유치원 아이들 대부분 하원하고 몇 남지 않은 종일반에서 엄마를 마냥 기다릴 둘째에게도 벌써 미안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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