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를 한 지 한 달이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로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보니 새로 살게 많았다. 일단 목숨을 연명하는 데 중요한 순서로 물건들이 들어왔다. 1번은 역시 에어컨이었는데, 당장 이삿짐을 풀고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밤새 더워서 잠을 못 자면 낮에 힘들 것 같다는 이유였다. 진즉 주문을 해 두었고, 이사 다음 날 오전에 에어컨이 들어왔다. 그다음은 냉장고와 세탁기 순이었는데, 냉장고는 에어컨이 들어온 날 오후에 설치를 했고, 세탁기가 들어오기까지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걸렸다. 빨래는 안 급했다 이거지.
사실상 그 상태로 한 달을 지냈다. 두 방은 텅 빈 채였고, 방 하나는 아직 풀지 못한 짐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사용했다. 나는 그냥 거실에서 살았다. 원래 쓰던 토퍼를 깔고 구석에서 잠을 잤고, 거실에 책상도 가져다 두니 예전 원룸과 다를 게 없었다. 창고 방이 세 개인 원룸인 셈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회사 일이 바빠서 집에 신경 쓸 틈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일주일 휴가를 내고 집안을 손보기 시작했다. 영 마음에 안 들던 벽지는 (핑크색이었다. 핫핑크.) 셀프로 페인트 칠을 했다. 참고로 페인트는 어렵다. 매장에서 본 색이랑 페인트 색이랑 인쇄된 샘플이랑 벽에 발라놓고 본 색이 다 다르다. 칠할 곳이 세 군데라 페인트도 세 번 골랐는데, 지금 벽에 칠해진 색들은 다 내가 생각한 색이랑 다르다. 생각한 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깔끔해졌다. 만족하기로 한다.
거실에는 큰 식탁을 들였고, 1인용 리클라이너를 소파 대신 쓰기로 했다. 리클라이너는 5년쯤 전부터 갖고 싶었는데 벼르고 벼르다 이제야 사본다. 사실 앉아본 것도 이번이 처음인데, 매장에서 이것저것 앉아보고 좋은 걸 골라 가격을 보니 제일 비싼 축이었다. 돈은 정직하구나.
원룸에 살 때 너무 갖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못 산 것들이 몇 개 있다. 리클라이너랑 책장이랑 무쇠 팬. 특히 책장은 한 10여 년 전부터 슬라이딩 2중 책장이 너무 갖고 싶었던 걸 이번에 질렀다. 휴가 때 책 정리나 하려고 했는데, 아직 배송이 안 와서 아쉽다. 다음 주말에나 책을 꽂아볼 것 같다.
이런저런 물건을 사다 보면 어느 순간 소비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물건을 잘 사는 편이 아니다. 딱히 갖고 싶은 게 많은 편도 아니고. 그런데 오만 물건을 한 번에 사다 보니 선을 넘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는 뭐 이 정도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산 적은 없다. 예전부터 리스트에 적어둔 것들이다. 그렇지만 전 같으면 이걸 굳이 사야 되나 몇 번 더 고민을 했을 텐데, 이제는 금방 고르고 금방 구매하기 버튼을 누른다. 큰돈도 턱턱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결제도 쉽다. 뭐 이리 순식간인지. 그래도 약간 낭비를 한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한 급씩 좋은 가구들을 들였다. 사놓고 보니 좋은 게 좋긴 하다.
덕분에 앞으로 반년 간은 월급이 없다. 월급 절반은 카드 할부 값으로 나가고, 절반은 대출이자로 나간다. 야근을 열심히 해서 야근비로 연명해야 한다. 주식이 좀 올랐으려나 하고 MTS를 켰다가 호다닥 끈다.
이번에 가구며 가전이며 사면서 든 생각들.
. 항상 보기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제일 좋고 제일 싼 물건을 찾으면 끝이 없다. 나는 매장을 정하고 다른 매장은 일부러 가보지도 않았다. 집 살 때도 비슷했고.
. 가전제품 모델코드 체계는 싹 뜯어고쳐야 한다. 회사 내부에서 관리할 제품 코드를 왜 소비자가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산 에어컨의 색상이 흰색인지는 모델명 옆 괄호 안에서 찾고 싶지, 16자리쯤 되는 모델 코드의 9번째 글자가 W인지 G인지로 구분하고 싶지 않다.
. 가전제품 홈페이지도 싹 뜯어고쳐야 한다. 오만가지 옵션들을 다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관리를 하니 봐도 알 수가 없다. 애플처럼 베이스 모델에 옵션을 고르게 해야 된다.
. 돈 많이 들고, 살 것도 많다. 취향도 다 다르다. 혼수 장만할 때 예비부부들이 왜 싸우는지 알 것 같다.
.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소파 놓을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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