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긴 자기소개
나는 겁이 많은 편인데, 그래서 엉덩이가 무겁고 결정을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아무래도 큰 일은 못할 팔자인가 보다. 그래도 늦지 않게 중요한 것들을 골라 결정하며 살아왔고, 결정이 늦은 덕분에 이만큼 밖에 못 됐지만 또 그 덕분에 별문제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작년에 집을 사면서 '나는 결정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렇게 선택을 해 왔었다.
① 일단 두고 본다
② 선택지를 줄인다
③ 최악을 생각해 본다
④ 결국은 마음 가는 대로
⑤ 후회하지 않는다
① 일단 두고 본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공부를 정말 안 했다. 가만히 문제를 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이 되는 딱 거기까지가 내 공부였다. 영어 단어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고, 수학 공식도 시간을 내서 정리하지 않았다. 내가 뭘 알고 모르는지도 몰랐고 문제를 분석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혀지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그 부분을 따로 공부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1학년 때 어렵던 개념들은 2학년이 되면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간신히 이해한 개념이나 버벅거리며 외웠던 구구단 같은 것들은 잊고 지내다 일주일쯤 뒤에 다시 보면 자연스레 체득되어 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배움과 앎에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정보를 정리하고 연산하는 그런 과정이 있는 모양이다. 어려운 선택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막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는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정돈되지 않은 정보들이 엉켜서 머릿속에 입력된 상태가 된다. 심지어 감정이 섞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려운 선택을 앞뒀을 때 일단 선택을 좀 미뤄두면 서서히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은 지워지고, 선택지의 의미가 뚜렷하게 정리가 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지면서 차분히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애써 고민하지 않더라고 결정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② 선택지를 줄인다
미뤄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지 않은 경우엔 의식적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내 생각에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선택지를 줄이는 거다.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일단 선택지를 줄인다. 내가 선택지를 줄이는 방법은 질문을 구조화하고, 필터링된 선택지는 쳐다도 보지 않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Global 한 최적점을 찾지는 못해도, 적어도 Local 최적점은 찾을 수 있다.
질문을 구조화하는 건 문제를 단순화하고, 일종의 필터를 만드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살 집을 구하는 일은 하나의 선택 문제 같지만, 단계를 구분해 보면 여러 선택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집을 살 거냐 전세를 살 거냐. 나는 돈을 얼마까지 쓸 용의가 있나. 위치는 어디로 할까. 집의 형태는? 대출은 얼마나 받을까 같은 것들이다. 각각의 작은 결정들은 서로 다른 근거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선택을 작게 쪼개는 건 결정을 쉽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선택에도 도움을 준다.
나는 "아파트를 산다 → 집값이 빠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산다 → 가용 자금의 절반을 사용하고, 대출은 한계까지 → 호재보다는 살기 좋은 동네 → 단지/타입 결정"의 순서로 범위를 좁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단 필터링을 하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결정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이걸 잘 못하는 것 같다. 일단 지금 사기로 결정을 했으면, 부동산 전망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해선 안된다. 반대로 말하면, 부동산 전망에 대한 고민은 매수 결정 전에 확실히 끝내 놓아야 한다. 결정은 전진해야지, 되돌아가면 끝없이 맴돌 뿐이다.
같은 맥락으로, 일단 필터링을 하고 나면 옆을 보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 정도 금액대의 집을 사기로 결정했으면, 다른 금액대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매수 지역의 후보를 결정하면 다른 동네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선택지를 줄이는 과정에서 최선의 선택지가 지워질 수도 있다. 단위 결정의 최선이 전체 결정의 최선임을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항상 최선의 선택을 지향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전국 모든 아파트 매물을 검토해야 할 거다. 일평생 끝낼 수 없는 과업이 된다.
③ 최악을 생각해 본다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집을 살까 말까 하는데, 부동산 전망은 당최 알 수가 없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최악을 생각해 보곤 한다. 집을 샀을 때 리스크는 샀는데 떨어지는 경우고, 안 샀을 때의 리스크는 집값이 오르는 경우다. 나는 후자를 더 위험하다고 봤다. 전자는 집을 비싸게 산 호구가 될 뿐이지만, 후자는 영영 내가 집을 못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요지는 그거였다.
최악에 대한 생각은 결정에 용기를 주기도 한다. 아이폰과 갤럭시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던 친구가 있었다. 평소에 아이폰을 쓰고 싶었는데, 막상 아이폰을 쓰려니 애플 생태계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했던 대답은 어차피 2~3년 뒤에 핸드폰을 바꿀 텐데 불편하더라도 3년만 참으면 되는 거 아니냐 였다. 내 이야기가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는 아이폰을 샀다. 내가 원룸 전세를 구할 때도 그랬다. 뭐 마음에 안 드는 데가 있어도 2년만 버티면 되니까 별 문제없겠지. 연구 주제를 정할 때는 이게 잘 안되면 논문은 없겠지만 어쨌든 졸업은 할 테고 그러면 취직은 해서 먹고는 살겠지. 그래서 나는 박사 기간 동안 재밌어 보이는 연구는 다 건드려 보았다. 집을 살 때도 그랬다. 일단 사고 아니다 싶으면 되팔지 뭐. 리스크는 거래 수수료 정도였고,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집을 샀다.
리스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반려된 것들도 있다. 스타트업 제안이 왔을 때는, 회사가 망하면 당장 나는 일자리가 없을 텐데 물경력이 쌓이면 이직도 어렵고 인생 복잡해지겠다. 나는 조인하지 않았다. 해외 포닥을 생각할 때도, 나는 박사를 오래 해서 나이가 많은데, 괜히 나갔다가 일이 꼬이면 먹고살기 힘들겠다. 그래서 유학은 관뒀다.
또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 새로운 기준이나 보기가 생기기도 한다. 집을 고를 때 집이 정말 마음에 안 들면 전셋집 방 빼듯 그냥 집을 팔면 되겠다는 생각은 내 심리적인 장벽을 많이 낮췄다. 동시에 그러면 거래가 활발한 단지를 들어가야겠다는 기준을 새로 만들어줬다. 주식에 돈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고민을 할 때도, 나는 경험적으로 내가 주식으로 잃을 돈의 최대치를 투자액의 30% 정도로 보았고, 이걸 기준으로 투자금액을 결정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한 가지 고려해볼 만한 점은 이 선택이 가역적인지의 여부다. 돌이킬 수 있는 선택은 리스크가 적고 해 볼 만하다. 앞서 이야기한 아이폰 문제나 전셋집 문제 같은 경우가 그렇다. 반면에 이직과 같은 비가역적인 선택들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④ 결국은 마음 가는 대로
이러쿵저러쿵 골라내고 난 뒤에도 고만고만한 선택지들이 남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인다. 둘 다 단점은 있지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혹은 결정을 내리기에 정보가 부족하다. 아무튼 나는 둘 중에 어떤 게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그럴 때는 역시 마음 가는 대로 한다. 그래도 선택의 기준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내 개인적인 기준은 '재밌어 보이는 걸 한다'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보기 중에 더 좋은 보기와 나쁜 보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생에 있어서 효율이 목적은 아니니까, 애써 가장 좋은 보기를 골라내려 하지 않는다. 투자 결정과 같이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그리고 결과를 어차피 알 수 없다면 그게 꼭 최선은 아니더라도 고민은 적당히 마무리 짓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을 고를 때도, 고만고만한 보기들 중에 마음이 끌리는 곳을 택했다. 연구실을 고를 때도 어딜 가든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민하고 고르나 연필을 굴리나 리스크가 다를 것 같진 않아서 교수님 인상을 보고 결정했다.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유튜브의 식빵 아재가 그랬다. 머리가 시키는 일을 하면 손해가 없지만,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면 후회가 없다.
⑤ 후회하지 않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선택의 마지막은 역시 정신승리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의 미래는 알 수 없으니 후회는 덧없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서 복기는 냉정하게,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 작은 철칙이다. 후회가 없으면 잘못된 선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