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아들인 윌리엄 스토너는 열아홉 살에 대학에 입학합니다. 평생 농사를 지었던 그는, 2학년 어느 운명의 날의 교양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마 그 순간 스토너는 300년을 뛰어넘어 들려오는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렇게 그는 불운하지만 열정적인, 어느 정도는 행복했을 그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 p.22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1965년에 출간된 소설입니다. 책날개에 적힌 소개에 따르면, 출간 당시 문단의 평가는 좋았으나 대중에게 어필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그러던 중 2006년 재출간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책입니다. 책날개에 인용된 비평가 마이어스의 말처럼 훌륭한 초보자용 책입니다.
소설은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농업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스토너는 셰익스피어에게 영혼을 빼앗긴 그 날 문학에 빠져들게 되고, 공부를 계속하여 교수가 됩니다. 분명 주춤한 순간들이 있기는 했지만, 스토너는 평생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그 정도가 가장 심했던 부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무관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무관심은 그를 결코 위대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고, 또 불운한 인생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렸습니다. <이방인>을 떠올리면 항상 쨍하게 해가 비추는 해변가에서 현기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로 게슴츠레 눈을 뜬 사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사내는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서서 무언가 생각하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 자신의 인생에서 마저도 - 이방인입니다. <스토너>를 읽는 중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떠오른 것은 무엇보다도, 뫼르소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그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한 셰익스피어의 목소리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죽음을 앞둔 두 주인공의 모습도 말입니다.
...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 알베르 까뮈, <이방인> 中
스토너의 부인은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소설 속에서 스토너는 그의 부인이 자신을 증오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기파괴적인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는 부모의 교육 속에서 자기 자신을 모두 소모해 버렸고,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스토너와 결혼을 했습니다만, 그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녀는 그를 증오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파괴할 뿐입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기는 그녀는 무언가 고장 났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무언 지는 알지 못합니다. 일종의 강박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불만에 잠식당해 있고, 그래서 의도하는 것이 아닌데도 주변을 망가뜨리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스스로를 모두 소비해 버리고, 스토너와 딸을 소비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스토너는 무관심한 사람이고, 그녀에게 관심을 끊기 때문에 결국 희생양은 딸이 되는 거죠. 엄마와 같이 딸도 텅 비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소설의 서두에서 스토너는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학계에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고, 그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학생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학을 사랑했습니다. 큰 욕심이 없었으니 여러 불운들도 그에겐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토너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사그라드는 삶을 느끼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질문 속에서 극심한 허무와 함께 묘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사족 1. 저는 대학원생입니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사실 스토너는 성공한 인생 같기도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교수란 말이에요. 먹고살기 힘든 이때에는 특히나 더 그렇게 보입니다.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좋은 시절입니다.
사족 2. 한국어판 표지가 참 마음에 듭니다. 갈라진 목판 같은 건조한 스케치가 소설과 정말 닮았습니다. 미국 NYRB판보다 훨씬 나아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