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아

현대인의 불치병

by Pearl K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XX카드 상담원 O O O 입니다.


앞에 놓인 전화기 불빛이 깜빡깜빡거리면 전화회선을 끌어다가 콜을 받으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첫 번째 멘트였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하려고 올라왔던 서울은 내게 한없이 냉정했다. 일러스트레이션과 포토샵을 가르쳐 주고 취업까지 책임져 준다던 그래픽 학원은 내 취업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 대신 어마어마한 카드빚을 내게 떠넘겼다. 취업사기로 노동부에 신고한다고 말한 후에야, 한 달치 학원비를 제하고 나머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급한 카드빚은 얼마 정도 해결했지만 계속 늘어나는 생활비와 월세를 대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D 카드회사였다. 나는 1주일간의 짧은 교육을 받은 후, 콜을 받도록 바로 투입되었다. 아침 8시 반까지 출근해서 점심시간은 고작 30분 남짓, 6시 반 퇴근 전까지 하루 종일 140 콜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을 타고 말을 걸어오는 고객들 중에는 카드 발급이 가능한 나이가 아니라고 안내를 하면 대뜸 욕설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화면에 표시된 주민번호 앞자리는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본인이 사용해 놓고도 카드 명세서에 왜 가게명이 찍혀서 나오나며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해진 퇴근 시간 이후에 8시 반까지 야근을 할 때면,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는 둥, 아가씨는 몇 살이냐는 등의 성희롱 전화들이 넘쳐났다. 한 번은 클레임 부서 상담원에게 전화가 와서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진상이 넘쳐났다. 하루 종일 160 콜씩 전화를 받고 나면 집에서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입안이 지꾸 말라서 아무리 물을 마셔도 계속 까끌까끌하고 입이 썼다.



넷플릭스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고 난 후에도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극 중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유진아의 기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나갔던 아빠,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출퇴근길에 무심히 지나쳤던 이웃집 남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본인이 교육을 맡았던 신입 장수진의 무단결근까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지내려 애쓰지만, 결국 유진아에게 쌓여있던 무언가가 폭발해버린다.



대학교 입학 후부터 결혼을 하기 전까지 18년간 혼자서 자취생활을 했다. 일상적으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출퇴근을 하고 혼자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삭혀야 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이 어떠한지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인생은 혼자이고, 내 상황도 감정도 혼자 챙겨야 한다는 걸 외롭게 배웠다. 작품을 보는 내내 유진아의 무덤덤한 표정이 괜찮은 척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것들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산다. 사람이란 결국 그런 시간들을 통해 조금씩 자라고 변해가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입안이 마르고 까끌까끌하고 입에서 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불과 십여 년쯤 전의 내 모습과 너무 닮아서 더욱 불편하면서도 다시 그곳에 앉아있는 것처럼 공감이 갔다.


설레다의 책 <내 마음 다치지 않게> 속에 나온 한 구절이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 빌려와 본다.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아."



#혼자사는사람들 #넷플릭스 #작품리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