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잉게

암시랑토 안허다

by Pearl K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작물과 분리되지 않은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동네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세탁소를 운영하던 강태국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전까지 세탁소도, 아버지 강태국 씨에게도 전혀 관심조차 없던 자식들은 남겨진 재산을 찾기 위해 한밤중에 몰래 세탁소에 잠입한다.


세탁소에서 곳곳에 숨어 숨겨둔 재산의 실마리를 찾던 강태국 씨의 자녀들은 한밤중의 세탁소에서 부딪친다. 형제들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이글대는 오염된 마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품 가득한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탐욕과 증오로 오염된 자녀들을 한 명 한 명 깨끗이 세탁해 준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았던 이 작품은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이라는 제목의 연극이다.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저주하던 형제들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비누거품 속에서 청량하고 깨끗한 향기를 내는 하얀 셔츠들처럼 다 같이 웃으며 하나가 된다.



이 책은 우연히 중간부터 펼쳐 보았는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맨 앞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가야 했다. 주인공은 아들의 죽음으로 고가의 인공지능 로봇과 필요 불가결하게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세탁소 아저씨 명정 씨와 은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인공지능 로봇이다.


17세의 소년의 외형을 하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 은결은 점점 발전하는 프로세스를 통해 꽤나 유용한 존재가 되어간다. 또한 명정은 은결을 통해 비로소 혼자일 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고독과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가벼워진다. 그리고 이내 은결과 함께 하는 생활에 익숙해진다.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동네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을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지도 자라지도 않는 인공지능 로봇 은결의 시선을 통해, 준교와 희수라는 두 아이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삶을 보여준다.


은결보다 작던 아이들이 은결의 키를 넘어 세상의 고뇌와 생의 주체를 책임지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자꾸만 자라고 변해가는 동네와 동네 사람들의 삶의 희로애락에 관한 덤덤한 서사 속에서 우리가 말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되었다.


"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돌이킬 수 없이 얼룩졌으나 어떻게든 입고 걸치고 끌어온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표백하는 불가능한 일에 대해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낡은 옷가지 속에 파묻었던 때 묻은 기억들을 말갛게 씻어낸 뒤 햇볕에 널고 싶었던 매 순간의 충동들을 돌이켜 본다. 지금까지 건조기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온 날들을,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최소한의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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