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밤, 조용히 일어나 술 취한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약간의 짐을 챙긴 후 고이 잠든 4살 딸을 다독여 안고 차에 태워 떠난다.
직업도 거주할 곳도 없는 엄마와 아이에게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다. 거주할 곳을 얻으려면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 정기적 수입을 받는 직업을 찾으려면 아이를 맡겨야 한다. 딸을 맡길 곳이라곤 조울증에 걸린 외할머니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보다 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그녀. 손쓸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스스로가 무력하기만 하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제목과는 달리 조용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서밤 님의 2021년 결산 추천작이라 궁금한 마음에 보게 되었는데, 보는 내내 너무나 화가 났다. 학대를 인지하고 떠날 용기를 내더라도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환경을 갖추는 것조차 너무도 팍팍하고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 버거웠다.
최선을 다해 아이와 함께 살아갈 기반을 마련하려던 그녀는 여러 가지 극한의 상황으로 아이를 위해 남편과 함께 살던 컨테이너로 잠시 돌아간다. 정말 잠깐만 지내려고 했던 것인데, 그녀는 다시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져서 탈출 의지마저 생각할 수 없던 그녀를 일으켜 세웠던 건 딸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또 닥쳐왔을 때였다. 그제야 그녀는 맨 몸으로 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그곳을 빠져나온다. 쉼터에 도착한 그녀는 아이와 함께 그대로 잠든다. 깊이 잠들었던 그녀가 깨어나 마침내 무언가를 할 의지를 되찾는 데는 꼬박 2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드라마는 정서적 학대가 얼마만큼 사람을 무기력하고 지치고 자신마저도 잃게 만드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체적 학대가 동반되지 않은 정서적 학대만으로도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나 한없이 황폐화될 수 있는가를 다룬다. 또 그 모든 과정에 주변 사람들의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말해준다.
조용한 희망을 보는 내내 나의 상황과 감정들에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었다. 지난 5년 여 동안 내가 직장에서 이유도 모른 채 정서적 학대를 경험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마음이 황폐화되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까지 많이 무너져 있었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용기를 얻었던 이유는 그녀의 딸 때문이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뻔해 보이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포기할 수 없는 원동력이었던 딸이 결국 그녀를 깊은 죽음 같은 잠 속에서 꺼내 주는 생명줄이 되어 주었다.
당신에게는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포기할 수 없는 용기를 내게 하는 소중한 누군가가 있는가. 그건 우리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팬데믹으로 인한 어려움의 시간이 끝날 줄을 모르고 지치도록 길어지는 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가족들, 고마운 이들로 인해 새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새로운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