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고 설 명절을 맞으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떡국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도 함께 먹게 된다는 풍습이 있다. 반대로 나이를 먹기 싫으니 떡국을 먹지 않겠다는 진담 반 농댬 반의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설날에 떡국을 먹기 시작한 이유는 장수와 재물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였단다. 쌀로 빚는 가래떡을 끊어지지 않게 길게 만드는 것은 장수를 상징한다. 가래떡을 엽전처럼 둥글게 써는 것은 돈을 상징하고 길게 늘인 가래떡처럼 재산이 늘어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특히 백의민족인 우리 민족에게 흰쌀로 만든 가래떡과 백설기는 순수하고 깨끗해 부정이 들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떡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과는 별개로 물에 빠진 밀가루 덩어리를 좋아하지 않는 입맛이라서 유사한 느낌의 수제비, 새알 심지어 떡볶이에서도 떡은 빼고 다른 부재료만 주로 먹는다. 그러다 보니 항상 설날에 내가 먹는 것은 떡국이 아니었다. 떡국 국물에 어제 남은 찬밥을 말아먹거나, 떡국 안에 들어간 만두만 건져 먹곤 했었다.
자취를 하고 혼자 설음식을 만들게 된 다음부터 나의 설날 음식은 언제나 만둣국 혹은 만두를 넣은 라면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내 나이는 떡국을 먹었던 어린 시절 후로 멈추었어야 한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해와 설날마다 떡국을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도, 나이는 잊지 않고 매년 잘도 늘어났다. 나는 2022년에도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떡국이 아닌 만둣국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안 되는 걸 알고 되는 걸 아는 거, 그 이별이 왜 그랬는지 아는 거. 세월한테 배우는 거, 두 자리의 숫자 나를 설명하고 두 자리의 숫자 잔소리하네. 채 두 자리를 넘기기 어려운데, 늘어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늘었어. 어린 변화는 못마땅해 고갤 돌려 한숨 쉬어도. 날 사랑해 난 아직도 사랑받을만해 이제서야 진짜 나를 알 것 같은데. "
처음 들었을 때보다 10년이 지나서 듣는 지금에서야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윤종신의 '나이'라는 곡의 가사다. 특히 '채 두 자리를 넘기기 어려운데 늘어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라는 부분을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찡해진다. 우리의 나이는 분명 이전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실 결혼을 하고 그다음 해부터 왠지 나이를 세어보지 않게 되었다. 모르는 누군가가 나이를 물어오면 '내가 몇 살이었더라' 하고 한참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핑계를 대자면 세상엔 나이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고 해야 하나. 어릴 때는 빨리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기를 바랐는데, 30대 중반이 지나고부터는 30대의 나이로 평생을 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 철이 없는데 숫자만 늘어나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평생 철들지 않고 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슬픈 건 나의 이러한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몸에서는 나이에 맞는 여러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30대 중후반부터 아토피 부작용으로 인한 눈의 빠른 노화로 이미 노안이 왔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까맣던 내 머리카락에 하얀 새치가 생기기도 했다.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생기고 예전처럼 음식을 잘 소화시키기도 힘들어 자주 체한다.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외쳐도 시간과 세월에 따른 몸의 변화는 너무도 정직했다.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
-조항조, '고맙소' 중에서"
나이가 들어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래도 인생의 절반 가까이 살아왔으니 내 감정도 좀 잘 다스리게 되고, 생의 여유가 가득 느껴지는 인성의 소유자가 될 줄 알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여서 어떤 일에는 지나치게 쫌생이처럼 굴기도 하고, 더 편협해지는 부분도 생기고, 가끔은 이기적인 모습들도 보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이와 인성의 성장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씁쓸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새해는 밝았고 이제 설 연휴도 끝이다. 떡국을 먹지 않았다고 아직 생일이 안 지났다고 아무리 우겨봐도, 반송도 안 되고 수신 거부도 불가능한 택배 '나이 한 살'이 모두에게 도착했다. 모두에게 주어진 나이 한 살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는 이제 각자의 몫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몇 년 후에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남지 않을 나이를 보내고 싶다.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후회만 남는다면 너무 슬픈 일이니까. 과거의 후회는 내려놓고 지금을 충실하게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란다. 그렇게 한 살 한 살이 풍성하게 가득 채워진 삶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