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고 서툴러서 더 빛났던 우리들의 시간

나도 그렜다

by Pearl K

그 시절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내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집 전화선을 사용하여 30분은 족히 걸리는 모뎀을 연결하고 파란 화면의 VT모드 서비스인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에 접속했다. 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닉네임으로 채팅을 나누고 온라인에서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한 친구와는 온라인 채팅으로 시작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무려 5년 동안 온라인을 넘어 펜팔을 주고받고, 밤새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었다. 서로의 모습을 상상하며, 너무도 잘 맞는 둘만의 대화로 마음을 나누며 그렇게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만날 것을 꿈꾸었다.

드디어 그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 우리의 접속 코드는 빨간 장미꽃이었다. 두근두근 설렘을 안고 신촌 홍익문고 앞에서 5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될 친구를 기다렸다. 노랗게 염색한 스포츠머리에 청바지, 영문자가 크게 쓰인 반팔티. 오랫동안 채팅으로 알아온 내가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우리는 이렇게나 말과 맘이 잘 통하는 친구인데, 서로의 외적인 모습은 전혀 상관도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낯선 느낌에 잠깐은 주위가 어색한 공기로 가득 차 얼어붙었더랬다. 다행히 홍익문고 옆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를 나눈 덕분에 우리의 어색함은 곧 풀렸다.


서로를 만나 신비감이 사라져서인지, 갑작스럽게 그 아이가 공군에 입대해서인지 그 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물론 군대에 간 이후에도 한동안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자대 배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좋아하던 가수의 팬클럽도 나우누리에서 처음 가입했었다. 2001년에는 그 가수가 진행하던 라디오의 팬페이지가 프리챌에 생기기도 했었다.


나의 시간 속에 묻혀있던 추억들을 꺼내 준 건 최근 몇 달간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던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다. 처음엔 웃픈 사건으로 시작되어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로 지내던 두 사람의 모습에 귀엽고 설레었다. 중간중간 유림이와의 워맨스도 참 좋았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났던 시간들을 공유하던 희도와 이진이는 청춘의 때를 뜨겁게 사랑했고 영원을 약속했다. 서로의 상황이 달라지면서 결국은 목소리도 눈동자도 애틋했던 체온마저도 멀어져 가는 사이가 되어 상처를 남기고 헤어진 두 사람. 매몰차게 말하고 헤어진 것을 후회하고, 이제는 과거의 기억으로 남은 서로를 애틋하게 추억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한 작품을 너무 좋아하고 꽂히면 그 대사들을 기억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면 그 작품의 대사들을 되새겨 직접 대본을 만들 때가 있다. 초반에는 못했는데 오히려 뒤로 갈수록 11화부터는 풀 대본을 만드는 수고를 했었다. 대사를 하나하나 적어가며 드라마에 담긴 이야기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님과 제작사에 꼭 부탁하고 싶다. 제대로 된 대본집이 출간되어 준다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다. 지난 4개월 동안 스물다섯 스물하나 덕분에 참 행복했다. 이 작품을 통해 빛나고 있었는지도 미처 몰랐던 반짝이던 내 청춘도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둔 대본 중 마지막 화의 마지막 장면을 대사로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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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끝에서 마주 보며 웃는 그날의 희도와 이진


나희도 (N)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할게 백이진. 너는 존재만으로도 날 위로하던 사람이었어. 혼자 큰 나를, 외롭던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사람이었어.

백이진 (N) 너는 내가 가장 힘들 때 날 일으킨 사람이었어. 네가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나희도 : 나도 나를 믿지 못할 때 나를 믿는 너를 믿었어. 그래서 해낼 수 있었어

백이진 : 너는 나를 웃게 했고 너랑 있으면 가진 게 없어도 다 가진 것 같았어

나희도 : 맞아. 어느 순간은 함께라는 이유로 세상이 가득 찼지

백이진 : 그래. 완벽한 행복이 뭔지 알게 됐어

나희도 : 너 때문에 사랑을 배웠고 이제 이별을 알게 되네.

백이진 : 네가 가르쳐준 사랑이 내 인생을 얼마나 빛나게 했는지 넌 모를 거야. 정말 고마워.

나희도 : 고마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어. 안녕, 백이진

백이진 : 안녕, 나희도

나희도 : 오늘은 너 먼저 가.

백이진 : (웃으며 끄덕이는 이진) 응

성인희도 (N) 모든 걸 갖겠다고 덤비던 시절이었다 갖고 싶은 게 많았다. 사랑도 우정도 잠시 가졌다고 착각했다.

나희도 (N)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연습이었던 날들. 함부로 영원을 이야기했던 순간들. 나는 그 착각이 참 좋았다. 아, 그래도 가질 수 있었던 게 하나 있었지. 그해 여름은 우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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